'사극열풍', 시청률 1등공신 역사왜곡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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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은 올해 TV를 통해 유달리 '과거로의 여행'을 많이 한 것 같다. '태조왕건''여인천하''명성황후''상도' 등 황금시간대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사극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왕조시대 권력을 둘러싼 암투.질투 등 원색적인 감정이 브라운관을 채웠지만 어쩌면 인간의 그같은 원초적 모습에 시청자들이 공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사'는 실종되고 '드라마(허구) '만 남았다는 비판도 많았다.

한편 시청자의 피부에 당장 와닿는 문제는 아니지만 방송업계에선 디지털 방송, 특히 위성디지털방송을 둘러싼 논란이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 두 가지 이슈를 정리해 본다.

KBS1의 '태조 왕건'을 필두로 SBS '여인천하', KBS2 '명성황후', MBC '상도' 등 방송 3사가 경쟁적으로 사극 제작에 뛰어들었다. 특히 '여인천하'와 '태조 왕건'은 40%가 넘는 시청률로 내내 1.2위를 다투었고 이에 질세라 MBC가 사운(社運) 을 걸다시피하며 최인호 원작의 '상도'로 맞섰으나 판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KBS의 '용의 눈물'과 MBC의 '허준'이 큰 성공을 거둔 이후 시청자들에게 교양을 준다는 명분과 높은 시청률이라는 실리를 모두 취할 수 있다는 점이 방송사들을 자극했기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사극 제작 붐에 따른 역기능이 줄곧 문제로 지적됐다. 바로 사극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한다는 점이다.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는 극적인 이야기가 필수적이었고 이에 집착하다보니 사료에 없는 에피소드를 삽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실(史實) 과는 관련이 없는 제작진의 자의적인 해석이 개입하는 경우가 적잖이 지적됐다.

예컨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왕이 평가절하되다 못해 여자들의 눈치를 보는 비겁자로 전락했고 최고 인기를 끈 '여인천하'의 경우 미천한 신분의 여인이 왕의 행차를 가로막는다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설정하기도 했다. 또 역사에 기록돼 있지도 않은 세자 책봉 시험을 버젓이 만들어내기도 했다.

최근엔 '태조 왕건'에서 경애왕이 견훤에게 목숨을 구걸하면서 무릎을 꿇은 채 걸어가 술을 따르는 장면이 방송되자 신라 경애왕 후손들이 반발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지 않다. 역사적 사실에만 매이면 역사 드라마가 갖는 극적 긴장을 살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사극도 드라마인 만큼 나름대로의 해석과 허구가 개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쳐 시청자들에게 잘못된 역사관과 지식을 퍼뜨릴 수 있다는 우려는 경청할 만하다.

사극이 왕조 중심 즉 궁궐 내에서 일어나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는 현상에 대해선 오래 전부터 비판이 있어왔다. 그런 면에서 MBC의 '상도'는 공간을 궁 바깥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야심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작품성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15% 이하의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 안타까움을 샀다.

아무튼 사극의 시청률이 좀체 수그러들지 않자 당초 계획보다 종영시기를 늦추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올해 말로 끝내려 했던 '태조 왕건'이 내년 2월까지 방송되고 '여인천하'는 언제 막을 내릴지 기약이 없다. 그런 만큼 사극 바람은 내년에도 계속될 듯하다. 그러나 시청률에 집착하는 한 역사적 사실의 왜곡을 둘러싼 논란도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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