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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중국 도시 이야기 (20) 뤄양(洛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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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20년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선전, 200년은 상하이(上海), 500년은 베이징(北京), 1000년은 카이펑(開封), 3000년은 시안(西安)으로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중국에 전한다. 장구한 5000년 역사의 중국을 알려면 단연 뤄양(洛陽)행을 꼽는다. 화려한 모란의 도시이자 9개 왕조의 수도였던 중화문명의 요람 뤄양으로 안내한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중화의 요람 뤄양

뤄양은 뤄허(洛河)의 북쪽에 위치한 도시라는 뜻이다. 뤄양시 남쪽에는 석굴로 유명한 룽먼산(龍門山)이, 북쪽에는 ‘살아서는 쑤저우·항저우, 죽어서는 북망(生在蘇杭, 葬在北邙)’으로 잘 알려진 베이망산(北邙山)이 자리 잡고 있다. 멀리 서쪽으로는 관중평원과 시안으로 통하는 한구관(函谷關), 동쪽으로는 소림사로 유명한 오악(五嶽)의 하나인 쑹산(嵩山)이 나온다. 뤄양 북쪽으로는 중화문명의 젖줄 황허(黃河)가 가로지른다. 뤄양이 위치한 황허와 뤄허 사이의 땅을 허뤄(河洛) 지역이라 부른다. 고대 화(華)와 하(夏)라는 이름의 씨족부락이 있던 곳이다. 화하(華夏)는 중화(中華)로 이어져 13억 중국인을 묶는 정신적 구심이 되고 있다.

 허뤄 지역은 한족(漢族)의 요람이다. 부계(父系) 사회가 진화해 내려온 역사의 기록인 성씨(姓氏)가 그 증거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족의 성씨는 총 4820개다. 그 가운데 120개 대성(大姓)이 한족 인구의 90.2%(11억7000만 명)를 차지한다. 허뤄 일대에 뿌리를 둔 성씨는 120개 성씨 중 52개(李·張·陳 등), 허뤄에 일부 뿌리를 둔 성씨는 45개(王·劉·趙 등)라고 한다. 뤄양 일대가 전 한족 인구 79.49% DNA의 뿌리인 셈이다. 멀리 대만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뤄양시 왕청(王城) 공원에 ‘뿌리는 허뤄에 있다(根在河洛)’는 대형 비석을 세운 이유도 뿌리를 찾고자 한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이었다.

둔황(敦煌), 윈강(雲崗)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불리는 뤄양시 룽먼(龍門)석굴 전경이다. 400여 년간 조성됐다. 훼손과 도굴의 역사도 길다. 1932년 장제스(蔣介石)가 일본의 침략을 피해 뤄양으로 잠시 천도했을 당시 인근에 도로를 내면서 많은 불상이 훼손됐고 중일전쟁 땐 일본과 미국 문물상들의 약탈 표적이 됐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됐다. [사진 신화사통신]

 뤄양은 9조고도(九朝古都)다. 기원전 771년 동주(東周)의 수도가 된 이래 후한(後漢), 조조(曹操)의 위(魏) 등을 거쳐 오대(五代)시대 후당(後唐)까지 아홉 왕조의 수도였다. 하지만 현재 과거의 궁궐터나 성벽은 남아있지 않다. 단지 뤄양 동쪽 교외의 백마사(白馬寺)가 후한시대 중국에서 최초로 건립된 절로 불린다. 그러나 지금 건물은 16세기 명(明) 왕조 때의 것일 뿐이다.

 뤄양은 흥미진진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의 중심지였다. 하(夏)·은(殷)이 모계씨족사회에서 부계씨족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면, 주(周)는 종법(宗法)제도를 내세워 부계 중심의 위계질서를 확립한 시기였다. 공자(孔子) 이래 중국의 이상은 주나라 정치제도의 회복이었다. 뤄양시는 2003년 주왕성(周王城) 광장을 조성하던 중 대규모 마차갱(坑)을 발굴했다. 여섯 마리 말이 끄는 마차 ‘천자가륙(天子駕六)’이 출토되자 대형 동상과 함께 박물관을 세웠다. 뤄양 일대에서는 지금도 주나라 시기 제사유적지를 발굴 중이다. 유물 가운데 산 채로 제물로 바쳐진 사람의 유골도 적지 않다. 유교에서 칭송하는 주나라 예악(禮樂)제도의 실상이다.

# 중국인에게 관우=재물신

주대에 확립된 위계질서의 나라 중국에는 묘지에도 등급이 있다. 백성의 묘는 분(墳), 귀족은 총(塚), 황제는 능(陵)이다. 황제의 스승 격인 성인의 묘는 임(林)이다. 무덤가에 빼곡하게 나무를 심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나무 그늘에서 시원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중국인의 정성을 담았다. 임은 두 개에 불과하다. 문성(文聖)인 공자의 무덤 공림(孔林)은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에 있다. 무성(武聖)으로 추앙 받는 『삼국연의』 관우(關羽)의 목을 묻었다는 관림(關林)이 뤄양에 있다.

 지금의 관림은 명 만력제(萬曆帝)가 이곳에 사당을 세우면서 조성됐다. 청(淸) 건륭제(乾隆帝)는 지금의 규모로 확장했다. 관림의 주요 건축물은 중축선을 따라 현판 ‘천추감(千秋鑒)’을 건 무루(舞樓)를 시작으로, 대문(大門), 의문(儀門), 용도(甬道·벽돌길), 배전(拜殿), 대전(大殿), 이전(二殿), 삼전(三殿), 석방(石坊), 팔각정(八角亭), 관총(關塚)이 일렬로 이어진다. 의문을 지나면 황제 전용도로인 용도 좌우로 돌사자 104개가 관운장의 묘를 지키고 있다. 청 강희제(康熙帝)가 세운 화려한 팔각정에는 ‘충의신무영우인용위현관성대제림(忠義神武靈佑仁勇威顯關聖大帝林)’이란 어마어마한 칭호가 새겨진 비석이 있다. 청 도광제(道光帝)가 관우에게 바친 최고의 타이틀이다.

 하지만 관우는 중국인에게 더 이상 무신이 아니다. 돈을 가장 많이 잘 벌게 해주는 재신(財神)으로 변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소금에서 찾는다. 관우의 고향인 산시(山西)성 셰저우(解州)는 유명한 내륙의 소금산지였다. 전국을 누비던 셰저우 소금상들은 향토 영웅 관우상을 들고 다니며 재운을 빌었다. 평생 돈과 관계 없었던 관우가 재신이 된 이유다. 지금도 매년 9월 29일이면 관림에서 국제행사가 열린다. 국내외 수많은 관제묘 관계자와 종친 조직이 모여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 궁궐을 내성 최북단에 배치

중국은 지금 수출에서 내수로 경제발전 방식의 ‘좐볜(轉變·변화를 뜻함)’을 외치고 있다. 뤄양은 역사적으로 변화의 현장이었다. 우선 주인이 바뀌었다. 위(魏)·촉(蜀)·오(吳) 삼국시대가 끝나자 북방의 유목민들이 화북으로 밀려 내려왔다. 한족은 고향 중원을 등지고 남으로 향했다. 전쟁과 분열의 시기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가 시작됐다.

 뤄양은 선비(鮮卑)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두 번째 수도다. 북위는 도무제(道武帝) 탁발규(拓跋珪)가 지금의 산시(山西)성 다퉁(大同)인 평성(平城)에서 건국했다. 6대 효문제(孝文帝)가 뤄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할머니 문명태후(文明太后)의 ‘치마폭’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다. 북위에는 ‘자귀모사(子貴母死)’라는 악습이 있었다. 황태자를 정하면 곧 생모를 죽여 외척의 정치 개입을 차단시켰다. 하지만 여권(女權)은 강했다. 4대 문성제(文成帝)의 부인 풍씨(馮氏·문명황후)는 친자식을 낳지 않아 살아남았다. 465년 문성제가 죽자 태후로 승격됐다. 그녀는 490년 죽을 때까지 권력의 화신이었다. 여황제 측천무후의 선배와 같았다. 제위에 있던 헌문제(獻文帝)와 효문제(孝文帝)는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헌문제가 문명태후에 반기를 들자 퇴위를 당할 정도였다. 영리한 효문제는 은인자중했다. 태후가 죽자 효문제는 남제(南齊) 정벌을 기치로 뤄양으로 진군한 뒤 뤄양에 주저앉았다. 명목은 천도였지만 속내는 문명태후의 영향력으로부터 탈출이었다.

 천도 직후 효문제는 한족을 대거 등용하는 개혁을 단행한다. 더불어 호족(胡族)의 옷과 언어를 금지시키고 선비족의 성씨를 바꿨다. 탁발을 원(元)씨, 독고(獨孤)는 류(劉)씨로 바꾸고 호적은 모두 뤄양으로 정했다. 황태자마저 아버지의 개혁에 반대했다. 그는 선비족 원로들과 평성으로 돌아가 쿠데타를 시도했다. 반란은 사전에 발각됐고 효문제는 친아들마저 극형으로 다스렸다.

 효문제의 뤄양은 보편적인 한족의 도성과 달랐다. 궁궐과 민가가 뒤섞이고, 시장이 궁성의 뒤편에 자리잡지 않았다. 궁궐을 내성 최북단으로 배치했고 궁궐 뒤에는 대형 공터를 정원처럼 조성했다. 유사시 탈출을 위해서였다. 뤄양에서 시작된 ‘북궁후정(北宮後庭)’으로 불리는 도시구조는 당(唐)나라 장안성(長安城)에서 완성된다. 성곽 없이 천막에서 지내던 유목민족의 습성이 도시 구조에 투영된 셈이다. 중국의 역사를 북방의 유목민족(胡·호)과 중원의 농경민족(漢·한)이 대결하고 융합하는 과정으로 보는 박한제 전 서울대 교수의 ‘호한체제(胡漢體制)론’의 논거 중 하나가 효문제의 뤄양성이다. 유목민 선비족이 한족으로의 ‘좐볜’이 뤄양에서 이뤄졌던 것이다.

 뤄양에서는 종교의 ‘좐볜’도 이뤄졌다. 북위는 유교가 아닌 불교를 신봉했다. 탈유입불(脫儒入佛)이 이뤄졌다. 북위는 전국적으로 승려가 300만 명, 사원은 2만여 곳에 이를 정도로 불교의 전성기였다. 뤄양의 룽먼석굴은 그 정수다. 둔황(敦煌), 윈강(雲崗)과 함께 3대 석굴로 불린다. 시작은 효문제의 뤄양 천도였다. 10세기 초까지 뤄양 남쪽 이수(伊水) 강가의 돌산에 대규모 조성사업이 이뤄졌다. 80만 명이 동원됐다. 석굴 전체의 길이가 1㎞, 부처를 새긴 굴이 1352개에 이른다. 정수는 675년 세워진 봉선사(奉先寺)다. 17.14m 높이의 거대한 노사나불(盧舍那佛)의 단아한 모습은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를 본떴다는 설이 전한다. 왼쪽의 천왕역사(天王力士)는 소원을 비는 이들의 손때로 정강이 아래는 새까맣게 변했다. 천왕역사는 멀리서 보면 몸의 비례가 맞지 않는 가분수다. 바로 밑으로 다가가 올려보면 완전한 비례를 이룬다. 흥미로운 조각술이다.

뤄양의 숨겨진 명소

●하도락서(河圖洛書) 유적 신화 속 복희(伏羲)씨가 황허에 떠내려오는 말의 얼굴을 한 악어의 등뼈에서 발견했다는 하도(河圖)가 뤄양에서 출토됐다. 복희씨는 하도를 연구해 주역과 태극, 팔괘를 만들었다. 뤄허에서 락서(洛書)가 적힌 신비로운 거북을 발견한 이는 신화 속 우(禹)임금이다. 우는 락서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는 ‘홍범(洪範)’을 만들었다. 뤄양시 뤄푸(洛浦)공원에 조성된 하도락서 역사문화광장에 하도락서를 새긴 기념석이 서 있다.

●이리두(二里頭) 유적 중국고고연구소가 1959년 발굴한 하(夏)나라 도성의 유적지다.

●멍진(孟津) 주나라 무왕(武王)이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은(殷)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켰다는 곳이다. 이곳에서 군사연습을 하고 800여 소국의 제후들을 불러모아 회맹(會盟)을 했다.

●한광무제릉(漢光武帝陵): 보통 배산임수의 황제릉과 다른 유일한 능이다. 황허 쪽으로 머리를 두고 베이망산 쪽으로 발을 뻗었다. 이유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다.

●시위안(西苑)공원 고구려를 침공한 수(隋) 양제(煬帝)의 개인 궁전 현인궁(顯仁宮)의 부속공원. 수양제는 뤄양을 동도(東都)로 삼고 현인궁 서쪽에 정원을 만들었는데 둘레가 200리에 이를 정도로 방대했다. 지금의 시위안 공원은 수나라 당시에 비하면 한 점의 크기에 불과하다.

●톈진교(天津橋) 수나라 때 세워졌다가 원나라 때 소실된 뤄허의 다리다. 지금의 다리는 1921년 당시 군벌 우페이푸(吳佩孚)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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