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특별한 하루'가 있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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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도저한 힘을 잃고 일상의 안온함에 마음을 저당잡힌 사람들에게 이 소설 『유언』은 축복이요, 자극제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하고 시적인 문체는 단숨에 결말을 확인해보고 싶게 한다. 1939년 작품임을 밝히지 않았다면 최근작으로 착각할 정도다.

그러나 숨을 고를 필요가 있다. 사랑과 증오, 신뢰와 배반, 기다림과 좌절 등의 주제를 아우르는 소설은 이런 이항 대립 속에서 고통스러울 때만이 진짜 살아있는 순간임을 알려준다.

소설은 주인공 에스터가 아주 특별했던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죽기 전에 회상하는 이야기다. 그 하루란 그녀의 옛애인 라요스가 불현듯 자신의 언니와 결혼하며 떠난지 20년 만에, 마치 오페라 가사같은 전보 한 장 달랑 부치고 돌아온 날이다.

라요스가 어떤 사람인가. 그는 희대의 거짓말쟁이며 어음 사기꾼이요,'카드 대신 감정과 사랑을 가지고 도박하는 별난 도박사'다. 언니가 죽은 뒤에야 찾아오는 것이다.

에스터는 언제나 걸려들고마는 함정에 이번만은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요령부득, 그녀의 가슴은 콩당콩당 뛰기만 한다. "이제야 그가 묵은 사랑의 약속을 위해 돌아오겠구나!"

그러나 배신자 라요스가 목소리를 높인다. 빚을 갚으라고. 네 집마저 달라고. 도대체 에스터가 빚진 게 무엇이기에. 20년 전 그날을 떠올리며 에스터는 황망해졌다. 시간은 무책임하게 흘렀고 에스터도 무뎌졌다.

라요스는 주장한다.

"용감하게 사랑해야 하오. 도둑이나 앞날의 계획, 천상과 지상의 그 어떤 율법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사랑해야 하오. 우리는 서로를 용감하게 사랑하지 않았소. 그게 바로 문제였고 그건 당신의 잘못이오."

이런!사랑은 진실해지고자 하는 사람만 골라 몰아붙인다. 에스터는 자신이 사랑에 모든 것을 다 걸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또 생각한다. "20년 전 내가 정말 현명하고 솔직했더라면 인간쓰레기 라요스와 함께 이 집에서 도망쳤을거예요."

1900년 헝가리 태생인 산도르 마라이(사진) 는 34년 자전적 소설 『어느 시민의 고백』으로 일약 세계적 작가가 됐으나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망명지를 떠돌다 89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권총으로 자살해 세상을 등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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