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퀸? 우린 ‘바롬이’ 뽑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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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자 서울여대 총장은 여성 리더십의 첫째 조건으로 ‘섬기는 리더십’을 꼽았다. 그는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먼저 훌륭한 팔로어가 돼야 하며, 그래야 독선과 아집에 빠지지 않고 남들도 흔쾌히 따르게 된다”고 강조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61년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설립한 서울여대가 올해로 52주년을 맞았다. 서울여대는 초대 학장이었던 고(故) 바롬 고황경 박사의 독특한 교육 이념인 ‘바롬인성교육’을 반세기 넘게 이어오며 인성교육 특화대학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한가운데 이광자(70) 서울여대 총장이 있다. 2001년 3월 제4대 총장에 취임한 뒤 잇따라 3선을 기록한 이 총장은 치열한 대학 경쟁체제 속에서 21세기 서울여대의 위상을 재정립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2년 총장 생활을 마치고 22일 퇴임과 함께 ‘자연인 이광자’로 돌아가는 그를 만나 서울여대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여대 유일 ‘잘 가르치는 대학’ 뽑혀

퇴임의 소회를 밝히고 있는 이광자 서울여대 총장.

 - 총장 퇴임을 앞둔 소회는.

 “제가 서울여대 1회 졸업생이다. 당시 서울여대는 국내 최초의 레지던스 칼리지여서 4년 내내 기숙사 생활을 했다. 1회 출신이라 자연스레 주인의식을 갖게 됐다. 주인의식이 있으면 문제가 훨씬 잘 보인다.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나. 진정성과 열정을 가지고 총장에 임했다.”

 - 12년 총장의 성과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2010년 여대로는 유일하게 잘 가르치는 대학(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에 선정된 게 가장 큰 성과다. 지난 50여 년간 꾸준히 이어온 인성교육이 밑바탕이 됐다고 본다. 에코 캠퍼스 조성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기후변화와 녹색성장’이란 과목은 전교생 교양필수과목으로 지정해놓았다. 국제화 시대를 맞아 영어 교육에 집중했고 20개국 86개 대학과도 교류협력을 맺어 매년 200명 넘게 교환학생으로 보내고 있다. 여대 최초로 IT 관련 학과도 만들었다. 미국의 명문 여자대학인 웨슬리대와 스미스여대의 성공사례도 참조했다. 동문들이 와서 보고는 가시적인 측면뿐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천지개벽했다고 하더라.”

 - 인성교육을 유독 강조하는데.

 “실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간 됨됨이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먼저 된 뒤에 학문도, 기술도 배워야 하는 것 아니겠나. 고황경 박사도 생전에 항상 3H를 강조하셨다. Head(지식이 아닌 지혜)·Heart(마음)·Hand(실천) 등이다. 이화여대에는 얼굴 예쁜 메이퀸이 있지 않나. 우리는 ‘미스 자율’을 뽑았다. 스스로 봉사하고 알아서 절제하는, 모든 학생의 모범이 되는 여대생을 학생들 스스로 선정했다. 이 전통이 지금의 ‘바롬이’로 이어졌다.”

 - 한데 시대가 바뀌었다. 요즘 학생들은 인성교육이란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갖진 않나.

 “인성교육 하면 흔히들 여고생들에게 한복 입혀놓고 절하는 법 가르치는 걸 연상하는데, 우리는 도덕이나 예절교육 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나는 누구인가, 자기 정체성을 키워주는 게 목표다. 21세기 다원주의 사회에서 자기 색깔을 제대로 나타낼 수 있도록 돕겠다는 거다. 학생들은 1학년 때 3주, 2학년 때 2주 등 총 5주간 친구들과 숙식을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서로의 장점을 배우고 ‘겟 얼롱(Get along)’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 학생들의 호응 속에 프로그램도 시대 변화에 맞게 끊임없이 보완해가고 있다. 최근엔 몽골과 동남아 대학들도 우리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고 국내 대학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슈퍼마켓식 벗고 자기만의 컬러로

 - 서울여대 새로운 50년의 지향점은.

 “우린 ‘미들 사이즈’ 대학이다. 많은 대학이 세계 몇 대 대학을 목표로 내거는데 대부분 공허한 얘기다. 큰 대학은 크기에 맞게, 연구 중심 대학은 그 본연의 취지에 맞게 특성화해 나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모든 대학이 수퍼마켓식이다. 이것저것 다 하겠단다. 그래선 경쟁력이 안 생긴다. 한 대학이 모든 걸 다 잘할 순 없다. 다원주의 사회에선 자기만의 컬러를 가져야 살아남는 법이다. 우리는 인성교육과 잘 가르치는 대학이란 장점을 최대한 살려 서울여대만의 ‘유니크한 명품 교육’으로 승부할 거다. 교육 중심 대학으로의 특화가 그것이다. 미국에도 작지만 훌륭한 대학이 많다. 그런 점에서 대학평가의 잣대도 달라져야 한다. 조건과 환경이 모두 다른데 어떻게 똑같은 양적 잣대로 평가할 수 있겠나.”

 - 서울여대만의 교육 철학이 있다면.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잘 가르치겠다는 거다. 그러기 위해선 교수들이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비료가 충분해야 하지 않나. 대학교육에서 비료는 연구다. 또한 학생 상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요즘 가정교육은 입시 위주로만 돼 있어서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오케이다. 학생들이 가정에서 보고 배우지 못하니 대학에서라도 인성교육이 필요한 거다. 나무는 자라는 게 보이지 않지만 햇볕을 쪼여주고 사랑과 정성을 쏟으면 무럭무럭 자란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봉사하는 삶도 강조점 중 하나다.”

 - 대학도 남녀공학이 대세인데, 여대의 존재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나.

 “미국도 1960년대 300여 개의 여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50개만 남았다. 우리나라도 13개에서 7개로 줄었다. 그럼에도 여성의 리더십을 키우는 데는 남녀공학보다 여대가 여전히 경쟁력 있다고 생각한다. 남녀공학 대학에선 아무래도 가르치는 게 남성 위주여서 여성들의 장점을 살려주기가 어렵다. 더욱이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다. 남녀 구별 없이 능력의 차이만 존재하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 여성들만의 집단에서 부드러움·섬세함·유연성 등 여성의 특성이 더욱 부각되는 것은 물론 가능성과 잠재력도 훨씬 잘 발휘될 수 있다. 실제 직장에서도 여대 출신들이 적응도 잘하고 인간관계도 좋고 리더십도 뛰어나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인턴을 마치고 그 회사에 취업하는 비율도 절반 가까이 된다.”

 - 여성의 리더십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먼저 훌륭한 팔로어가 돼야 한다. 먼저 솔선수범하고 섬기는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을 갖춰야 성숙한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래야 역지사지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그렇잖으면 독선이 되고 아집이 된다. 우리 대학은 이처럼 좋은 팔로십을 지닌 잠재적 여성 리더를 키우는 데 중점을 둘 생각이다. 남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인정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이게 사랑의 마음이고 진정한 팔로십이자 리더십이다. 그럴 때 사람들이 흔쾌히 따르게 된다. 지식은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지혜를 갖춘 여성 지도자 양성은 결코 쉽지 않다.”

 - 12년 총장을 했는데 장수 비결은.

 “진정성을 가지고 열심히 한 것 말고 또 있겠나.”

 - 이번에 그만둬야겠다고 맘먹은 계기는.

 “그냥…, 때가 이때인 것 같았다, 허허.”

 - 1960년대 어려웠던 시절 미국 유학까지 갔다.

 “저는 개화된 집안에서 자랐다. 6남매 중 셋째 딸이었는데 집안에서도 할 얘기가 있으면 손을 들고 자유롭게 말하는 분위기였다. 아버지도 공부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하라고 하셨고, 그래서 젊은 나이에 유학도 갔고.”

 - 남편은 어떻게 만났나.

 “아버지 친구분인 목사님이 중매를 하셨다. 9살 차이였는데 남편이 마흔 되기 전에 장가 가야 한대서 12월 31일에 서둘러 결혼했다.(웃음) 남편은 독일에서 박사를 따느라 결혼이 늦었다.”(남편 이필우 건국대 명예교수는 건국대 경상학부 교수를 지냈다.)

 - 39세 남편 만나는 게 억울하진 않았나.

 “전혀. 저라고 연애 안 했겠나.(웃음) 두 번째 만났을 때 이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겠다, 조금만 노력하면 함께 잘살 수 있겠다 싶었다. 남편이 종손인 데다 시댁도 보수적인 집안이어서 평생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제가 가족사회학을 전공했는데, 사회학개론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에게 ‘나는 100년 앞선 가정에서 자라 100년 뒤진 가정으로 시집갔다’고 말하곤 했다.”

 - 교수 하면서 아이 셋을 키웠는데.

 “늘 방관 상태였다. 제대로 정성 들여 키우지 못한 것 같아 늘 미안하다. 아이들과 충분히 소통하지 못한 아쉬움도 크고. 아무리 노력해도 24시간 전업주부와는 다르더라. 정보도 부족했고….”

 - 앞으로의 계획은.

 “건강이 허락된다면 15년은 더 일하고 싶다. 나에게 맞는 일과 역할이 뭘지 모색 중이다. 국사와 세계사 등 역사 공부도 하고 싶다. 역사를 알아야 현재와 미래도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글=박신홍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광자 총장=1943년 서울생. 이화여중·고를 졸업하고 서울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켄트주립대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71년부터 서울여대 사회사업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서울여대 학생처장·대외협력처장을 지냈으며 대학총장협의회장과 서울복지재단 이사장, 호암상 사회봉사 부문 심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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