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학 조각전 '새의 형상'…단아한 선 생동감 넘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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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새들은 움직임 직전의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어떤 것들은 막 땅을 차며 비상하고,어떤 것들은 막 내려앉는다. 서로 바라보며 그리워하거나, 사람처럼 식식거리며 싸우기도 한다.

녹슨 무쇠의 차분한 빛깔이 조각으로서의 중량감과 안정감을 주지만, 새들은 생동감 있게 날갯짓하고 있다.어떤 새는 기쁨으로 떨고, 어떤 새는 고통의 심연에 잠겨있다. 그리고 우리를, 어떤 새는 웃기고, 어떤 새는 처량하게 하며 어떤 새는 침묵하게 한다."(사진가 강운구)

서울 청담동 박여숙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이영학(53) 씨의 조각전'새의 형상'에선 기쁨과 슬픔, 그리움과 적막함을 담은 새들을 만날 수 있다. 무쇠로 만든 30여마리의 새들은 간결한 형태미와 저마다의 긴장감으로 퍼덕거린다.

그의 새들은 50~70년대에 무쇠로 만든 우리나라 농기구와 각종 연장을 땜질해서 만든 것이다. 부리는 돌쩌귀, 다리는 대개 대못이다. 몸통은 연탄집게.가위.등잔.호미.낫.망치.아령.도끼.삽.인두.펌프 주둥이.꽃삽.다리미다.

필요에따라 구부리는 경우 외에는 원래의 형태 그대로, 모양에 맞춰 땜질해 이었을 뿐이지만 '영혼을 응시하는 듯한' 울림을 전달한다.

이전의 새들이 볏과 방울로 치장을 했었다면 올해의 작품들은 조각적인 양감을 배제하고 선의 흐름을 위주로 한 단아하고 간결한 모습이 특징이다.

이번 작품들은 작가가 서울대 조소과 재학시절부터 30여년간 계속해온 고철 재료 연작의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다.

"대학 입학 무렵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지요. 수업에 들어가려니 조각재료를 살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고물상에서 녹슨 호미같은 고철 몇개를 주워 갔지요. 그걸로 새를 만들기 시작했더니 최종태 선생님 등이'재미있네'하시더라고요. 기성품 오브제를 작품에 도입한 조각은 내가 우리나라의 효시가 될 겁니다."

그는 "우리의 연장처럼 고운 것은 없다. 서양은 풀 베는 도구만 봐도 무기 수준이지만 우리 것은 손에 딱 맞는 크기와 형태"라며 "수십년 사용한 연장들 속에 들어있는 영혼을 훨훨 날려보내 주고 싶어 새를 만든 것"이라고 말한다.

무쇠를 담금질 해 만든 옛 도구들로 만든 작품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한다. "더 이상은 그런 재료를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의 시립 장식미술학교에서 7년간 수학했지만 작품에서 서양조각의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는다.

"우리 것, 아니 나만의 독특한 것이 없으면 세계 어디에서도 명함을 내밀 수 없다. 아류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점은 조각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진리다"고 강조한다.

김수환 추기경.박경리 작가 등 유명인 1백여명의 흉상과 삼성중공업 환경조형물.이중섭 거리 이름 기념비 등을 제작한 작가의 17번째 개인전이다.

전시에 맞춰 사진가 강운구씨가 찍은'새' 1백30여컷을 실은 작품집 '이영학의 새'(까치) 도 출간됐다.24일까지.

02-549-7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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