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명예의 전당 (27) - 칼 야스트렘스키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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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시즌을 앞두고, 보스턴 레드삭스는 폴란드인의 피를 물려받은 22세의 신인 한 명에게 영광스러운 동시에 너무나 부담스러운 임무를 맡겨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레드삭스의 주전 좌익수'라는 위치는, 보스턴 야구의 실로 거대한 '상징' 두 가지가 필연적으로 그를 왜소해 보이게 할 수밖에 없음을 뜻하고 있었다.

그 둘 중 하나는 '그린 몬스터(The Green Monster)'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바로 '테디 볼게임(Teddy Ballgame)'이었다.

테드 윌리엄스의 후계자. 과연 이보다 더 크게 중압감을 주는 칭호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임무는 '역사상 최고의 타자', '신이 야구에 내려 준 선물' 등의 찬사에 너무나 익숙했던 인물의 빈 자리를 메우는 것이었다. 보스턴 팬들은 그가 훗날 '제 2의 테드 윌리엄스'라 불릴 만한 또 하나의 영웅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그가 은퇴를 발표했을 때, 그는 과연 또 하나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적합한 수식어는 '제 2의 테드 윌리엄스'가 아니었다. 한때 윌리엄스의 이름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이름인 '칼 야스트렘스키' 자체가 팬들에게 '레드삭스'라는 단어와 동의어로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야즈(Yaz)'처럼 오랫동안 레드삭스를 지킬 선수가 또다시 출현할 것인가? 그는 피트 로즈를 제외한 역대 메이저리거들 중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레드삭스 역사상 안타, 득점, 토털베이스(총루타수), 타점 부문 최고기록 보유자라는 타이틀과 3000안타 - 400홈런 클럽 멤버십은 그토록 길었던 커리어의 부산물이다.

그가 아메리칸리그에서 활약하던 중에 이 '주니어서킷'에서 MVP가 된 선수 중에는 미키 맨틀도, 칼 립켄 주니어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빅리그 데뷔전 소식은 유리 가가린이 역사상 최초의 우주비행을 성공시켰다는 뉴스와 동시에 신문에 올랐고, 그가 유니폼을 벗었을 때는 마이클 잭슨이 가장 유명한 연예인으로 부상한 뒤였다.

어쩌면 그토록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그에게는 보람이기에 앞서 고역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윌리엄스가 '지구상에서 인구당 신문 수가 가장 많을 듯한 곳'이라 불렀던 보스턴에서 빅리그 커리어 전부를 보냈고, 윌리엄스를 항상 괴롭혔던 보스턴 언론은 야스트렘스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그리고 극성스러운 보스턴 팬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엄청난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처음에 그들이 원하였던 것은 '제 2의 윌리엄스'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제 2의 1967시즌'이 새로운 요구사항으로 등장하였다.

실현될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 그것은 레드삭스의 1967시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었다. 그 시즌은 레드삭스 역사의 일부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신화였다. 그리고 야스트렘스키는 그 신화의 주인공이었다.

1967시즌이라는 이름의 신화를 완성하고 난 뒤의 야스트렘스키는, 마치 너무나 훌륭한 필생의 역작을 발표한 뒤의 예술가처럼 하나의 숙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시즌 후에도 그는 분명 최고의 선수들 중 하나였지만, 그러한 '걸작'을 다시 만들어내리라는 팬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퇴장이 다가오고 그가 1967시즌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그 시즌은 비로소 그에게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닌 '찬란한 업적'이 되었다. 어쩌면 보스턴 팬들은 그에게 걸었던 크나큰 기대를 버린 뒤에야 그가 보스턴의 영웅임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칼 마이클 야스트렘스키 주니어는 1939년 8월 22일, 뉴욕 주 롱 섬의 동쪽 끝에 위치한 사우샘턴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출생한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폴란드계 이주민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칼 야스트렘스키 시니어와 어머니 해티도 마찬가지였다.

소년 칼은 감자 농사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아버지를 도와 농장 일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농장 일만을 시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주니어'가 일찍부터 야구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다.

젊었을 때의 칼 야스트렘스키 시니어는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상당히 뛰어난 선수였으며,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입단 제의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는 대공황 시대였기 때문에 좀더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던 그는, 결국 농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척들과 처가 쪽 사람들을 모아 '화이트이글스(White Eagles)'라는 아마추어 팀을 만들었고, 그 팀에서 직접 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소년 칼은 어릴 때부터 이 화이트이글스에서 배트보이 역할을 하며, 자연스럽게 야구라는 스포츠에 익숙해졌다. 또한 좀더 성장한 뒤에는 리틀리그의 브리지햄턴 라이언스에서 유격수와 투수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주니어'가 성인들과 함께 경기에 나설 만큼 성장하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화이트이글스에 입단시켰다. 그러나 당시 그의 친척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이 든 상태였기 때문에, 이 팀은 곧 해체되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지역 세미프로 팀에 데려가 함께 입단하였다. 세미프로리그에서 이 부자(父子)는 내야수로서 뛰어난 수비력을 과시하여 이목을 끌었다.

소년 칼은 브리지햄턴고교에 입학한 직후에는 미식축구와 농구 등을 야구와 병행하기도 했으나, 부상을 우려한 그의 아버지는 미식축구만큼은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칼은 농구에서는 계속 두각을 나타냈고, 군(County)내 고교농구 시즌 득점 기록 보유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장래가 걸린 종목은 역시 야구였다. 그는 투수로서 명성을 날렸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그를 노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졸업 직전 열린 1957년 군내 고교 토너먼트에서는, 준결승에서 벨퍼트 팀을 상대로 16탈삼진을 뽑아낸 데에 이어 결승에서 센터 모리치스 팀을 맞이하여 노히트게임을 기록하였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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