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사람 우선 배려한 일본 신호등

중앙일보

입력

일본에 온 지 1년 가까이 돼 가지만 지금도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종종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습관이 있다. 파란불이 켜진 횡단보도만 보면 발걸음이 빨라지거나 뛰는 자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정상속도를 되찾곤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한국의 횡단보도다.

한국의 횡단보도는 사람이 걸어서 건너가기엔 파란불이 켜진 시간이 너무 짧다. 건장한 남성이 출발선에서 시작해도 도중에 파란 불이 깜박거려 심리적 압박감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인들은 파란불이 켜져도 길을 건너기가 늘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런 생활에 익숙하다가 일본의 횡단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받은 인상은 상당히 신선했다. 횡단보도에서 10m 정도 못미친 지점에 왔을 때 파란불이 켜져 급한 일이 없으니 다음 신호에 건너자는 생각으로 천천히 걸어갔는데 여전히 파란불인 데다 길을 다 건넌 다음에도 파란불이 켜져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한번은 다섯 곳의 신호등을 대상으로 파란불이 켜져 있는 시간을 재본 적이 있다.

국회 근처의 히비야(日比谷)공원 앞 9차선 국회로는 45초, 미나토(港)구 사이세이카이(再生會)종합병원 앞 2차선 도로는 60초였다. 대부분 30초에서 1분이었다. 여기에다 파란불이 깜박거리는 시간(8~10초)을 합하면 길을 건너는 시간은 더 길어진다.

한국보다 최소 2배 이상 길다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빨간불이 켜진 시간이 한국보다 훨씬 긴 것도 아니다. 파란불이 켜진 시간과 엇비슷한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들른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하면 모두 이구동성으로 수긍한다. 결국 한국의 신호등이 사람보다 차량을 중시한다면 일본은 사람을 우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 영국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선진국이란 단순히 경제적인 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약자를 얼마나 보호하고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동차보다는 사람을 우선하고, 장애인.어린이.여성을 보호하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내년 월드컵 때 한국을 찾은 많은 외국 손님들이 횡단보도에서 당황해하면서 어떤 생각을 할지 걱정스럽다.

오대영 특파원 dayyou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