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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104억달러 정말입니까

중앙일보

입력

우리 속담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다.

기대가 너무 성급하다는 말이다. 영국.노르웨이.헝가리 등 유럽 3개국 순방 외교에서 1백4억달러어치의 성과가 있었다는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발표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세일즈 외교의 위력?

이틀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현지에서 타전된 연합뉴스 기사를 좀 보자. "김대중 대통령은 이번 유럽 3개국 세일즈 정상외교를 통해 총 1백4억1천만달러의 수주성과를 거둔 것으로 집계됐다고 이기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밝혔다." 분야별 수주실적이 뒤를 이었다.

▶외국인투자 유치 41억8천만달러▶건설 및 플랜트 수출 52억6천만달러▶정보기술(IT)분야 진출 9억7천만달러이며, 나라별로는 ▶영국 90억5천만달러▶노르웨이 9억6천만달러▶헝가리 4억달러라는 것이었다.

李수석은 이미 출국 전에 비슷한 수치를 밝힌 바 있다. 이번 순방에서 성사될 것을 취합해 보니 1백억달러를 넘어섰다는 말이었다. 그 때도 분야별 예상 유치실적이 첨부됐다. 아무리 효험있는 세일즈 외교라 해도 어떻게 시작도 하기 전에 이런 숫자가 나올 수 있었을까.

이번 순방의 계기는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1백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잦은 외유에 대한 일부의 곱지 않은 시선 등을 의식해 참모들이 세일즈 외교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고 한다. 아주 잘한 일이다.

한 나라의 최고경영자(CEO)로서 대통령이 외국 기업과 자본을 유치하고, 수출 활로를 뚫는 데 보탬이 된다면 칭송받을 일이다. 이런 일들이 바로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고 일자리 창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일자리 얘기가 나왔으니 여기서 얘기를 잠깐 옆으로 돌려보자. 달포 전 삼성물산은 무역부문 인력채용 공고를 냈다.

고작 15명 모집이었는데 몰려든 인파는 자그마치 1만명에 달했다. 대학.학점.토익점수 등 여러가지 기준을 다 동원해 1천명까지 추려보니 다들 쟁쟁한 인재였다고 한다. 실무자들이 최종 면접자를 40명으로 압축하기까진 한참 더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고학력 청년실업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상황에서 1백억달러짜리 외교를 펼치겠다는 李수석의 발언은 국민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말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외유 나가기 전에 늘 나오는 발표가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서울에 앉아서 어떻게 1백억달러를 따올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는 지적이었다.

청와대 참모진은 애써 벌인 세일즈 외교를 언론들이 평가해 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엄청난 금액을 스스로 무의미하게 만든 자신들을 되돌아볼 일이다.

경험에 비춰보건대 1백4억달러에는 가능한 모든 금액이 포함됐으리라 여겨진다. 이번 순방 이전부터 양국 기업간 오간 얘기(영국 유통업체 테스코의 경우)를 비롯해 이제 막 수출상담을 시작한 것까지 몽땅 거둬들여 합친 숫자일 가능성이 크다. 영국 기업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참여한다는 플랜트 수출건(9개 사업 45억1천만달러)은 아직 입찰도 시작되지 않은 것이라 한다.

수출상담분 합쳤을 가능성

예컨대 한달 매출 실적은 그 달에 실제로 판 것을 잡아야지 상담분까지 합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번 순방에서 우리측이 얻은 소득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금액이 작더라도 그걸 말해야 한다. 실적을 크게 보이려 하는 것을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 한다.

일을 추진함에 있어 지금까지 마무리한 것과 앞으로 할 것을 나눠보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둘이 마구 엉켜 있으면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 참모진들은 이번 순방의 실적을 내세우기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챙기는 데 주력해야 한다.

정상외교에서 오간 대화내용을 발판으로 우리 기업과 정부가 합심해 결실을 따내는 방안을 찾아나서야 한다는 말이다.

심상복 국제경제팀장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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