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정일용 구리 원진녹색 병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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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20일 오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원진녹색병원 1층 원장실. 이 병원의 정일용(鄭壹溶.43.외과 전문의)원장은 경기도 마석의 한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출신 근로자 칸(28.가명)의 조직검사 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원인불명의 선암(腺癌)입니다. 시한부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은 인생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제 역할인 듯 싶네요."

한숨과 함께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그는 말을 이었다. "통증을 참다가 외국인 근로자에게 의료비를 50% 할인해 준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나 봐요. 좀더 일찍 왔다면 손을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의료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며 "소외된 계층을 지원하는 의료체제 구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사실 그동안 鄭원장은 한번도 소외된 환자들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는 1987년 대한나관리협회 충북지부 관리의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2년간 청주에서 매주 두 차례 서울 행당동 소망진료소를 찾아 빈민들을 돌봤다.

한양대병원에 근무하던 94~95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광진구 자양동 천주교회가 운영하는 외국인노동자수용소를 찾아 무료 진료를 했다. 또 98년 5월부터 5년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동료들과 함께 서울역 지하도 등에 야외진료소를 설치하고 매주 금요일 저녁 노숙자들을 무료진료하고 있다.

"매주 1백30여명의 노숙자들을 진료하고 있지만 이 같은 방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노숙자 문제는 더 이상 몇 명의 의사들한테 맡겨서는 안 되고 정부차원에서 지원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는 노숙자들에 대한 사회 전반의 관심을 호소했다. "노숙자들의 평균 수명은 48세에 불과합니다. 노숙자들이 건강하게 살기는 힘들겠지만 사회적 무관심 때문에 죽어가는 일은 막아야 합니다. 사회가 보듬어주지 않으면 자활은 꿈도 꾸기 어렵습니다."

98년 9월에는 파라핀 주사를 맞은 뒤 피부가 썩어 문드러진 노숙자 金모(30.남)씨가 도움을 호소해왔다. 당시 체온이 39도까지 올라가고 패혈증으로 인한 쇼크사 가능성도 컸던 상황이었다.

그는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와 네 차례에 걸쳐 무료로 직접 수술을 해줬다. "지난해 결혼한다는 연락이 왔더군요. 노숙생활도 접고 가정까지 꾸렸으니 새 사람이 된 셈이죠. 정상인으로 복귀한 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남을 돌보는 데 앞장서 온 그에게도 마음 한편에 큰 빚이 있다. 지난 3년간 인의협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노숙자 무료진료 등에 참여하느라 인의협 역점사업인 낙도 의료봉사 활동에 한 번도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장래 소망도 이같은 미안함에서 비롯됐다.

"10년 후에 외딴 섬에 작은 병원을 열 생각입니다. 의사가 없어 갑작스럽게 아플까봐 노심초사하는 이들의 곁에 있는 제 모습을 생각할 때가 제일 행복합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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