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관련책 테러 후 꾸준히 팔려

중앙일보

입력

2001년 후반기 한국 출판동네에서 최대 화두 가운데 하나는 '미국'이다. '미국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의 책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최근 국내 대형서점의 정치사회분야 베스트셀러에는 미국관련 책들이 10위권 안에 6종이나 포함돼 있다.

『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 지음, 김영사) 『문명의 충돌』(새뮤얼 헌팅턴 지음, 김영사) 『불량국??노암 촘스키 지음,두레) 가 나란히 1.2.3위를 차지한데 이어, 『숙명의 트라이앵글』(노암 촘스키 지음,이후) 『문명의 공존』(하랄트 뮐러 지음, 푸른숲) 『전쟁과 평화』(노암 촘스키 외 지음, 삼인) 가 또 8.9.10위에 올라 있다. 다소 딱딱하고 묵직한 주제의 책들이 잘 팔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9.11 테러에 의한 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는 있지만 관심의 강도가 다소 누그러진 상황에서도 이런 유형의 책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 데 대해 한 출판계 인사는 "테러와 같은 유행적 소재를 넘?사태의 본질을 보고싶어하는 지식 대중의 관심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흐름은 제3세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 미국 외교정책의 본질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던지는 경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출간된 『키신저 재판』(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아침이슬) 은 이런 경향을 대표적으로 반영한 책이다.

◇ 키신저 재판=세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197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미국의 외교전략가 헨리 키신저를 '국제 전범(戰犯) '이라며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 신간 『키신저 재판』이다.

이 책에서 키신저는 '세계평화의 사도'가 아니라 미국의 국가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나라에서 전쟁과 암살 등을 시도하는 것도 마다않은 '두 얼굴의 사나이'로 그려진다. 현재 뉴욕의 뉴스쿨에서 강의하고 있는 저자 히친스는 '리틀 촘스키 혹은 리틀 사이드'라고도 할 수 있는 비판적 지식인이다.

히친스는 최근 공개된 비밀외교문서 등을 바탕으로 "키신저가 인도차이나 전쟁, 방글라데시의 대량 학살, 칠레와 키프로스에서 벌어진 암살, 그리고 동티모르 학살에 직접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키신저를 통해 본 착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한 폭로다. 미국의 외교전략에서 세계 선린이나 평화는 수사(修辭) 에 불과하고,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서 모든 일이 기획되고 실행된다는 것이다.

기밀해제된 1975년 미 국무부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국무장관이던 키신저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군사정권과의 유착관계에 회의적인 태도를 나타내던 국무부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여러분은 국익을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외교관은 국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외교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기실 문서공개를 인용하고 있는 점을 빼면 새로운 지적도 아니다. 지난해 출간돼 꾸준히 읽히고 있는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 (삼인) 등에서 보듯 노련한 국가전략가의 미국 이익추구는 줄곧 노골적으로 표현돼왔기 때문이고, 이는 오히려 우리에겐 왜 그러한 전략가조차 부족한가라는 반성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미국관련 서적 문제는 없나=최근 붐을 이루는 미국관련서는 거의 전부가 번역서다. 조금 팔린다 싶으니까 번역이 잇따르는 양상이다.

이제는 출판계가 기획력과 창조성을 발휘해 새로운 형식의 국내 저작물을 만들어 내야 하고, 우리 입장에서 국제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조명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리고 자칫 섣부른 반미(反美) 는 단순한 친미(親美) 만큼 이나 우매하고 위험할 수 있다는 시각 아래 좀 더 거시적으로 한국의 입장에서 우리의 국가전략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함재봉(연세대 정외과) 교수는 미국 비판서적의 붐에 대해 "한편으로 우리가 무시하고 있었던 세계를 발견하게 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면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70년대 부터 필명을 날린 비판적 지성의 대표격인 촘스키나 사이드만 해도 지극히 미국적인 사람들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함교수는 "미국에서 극단에서 극단까지 모든 논의가 다 나오는 모습을 사이드나 헌팅턴 등에서 대표적으로 볼 수 있다"면서, "미국을 찬양하든 비판하든 소개되는 책이 대부분 미국책 번역서라는 점에서 미국의 큰 시각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보다 큰 현실을 보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거대한 체스판』을 번역한 김명섭(한신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미국 비판서적들을 보고 나서 이제 미국과의 관계를 끊고 유럽이나 중국을 더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 등은 재고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김교수는 또 "우리가 미국을 통해 세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도 우리의 문제의식속에서 세계평화와 같은 보편적 의제를 창출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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