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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페이퍼클립 vs 오소아비아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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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호 29면

70년 전인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패배한 나치 독일은 초조해졌다. 제한된 군사력과 자원·경제력으로 싸우려면 첨단 비밀무기를 개발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해 초 군 복무 중이던 과학기술자 4000여 명을 독일 북부 발트해 연안의 페네뮌데 로켓연구소로 차출했다. 이들은 사거리 320㎞짜리 탄도미사일 V-2(Vergeltungswaffe-2·보복무기 2호) 로켓을 개발했다. 독일 중부 노르트하우젠의 로켓 공장에서 종전(終戰) 때까지 5200기를 생산해 상당수를 벨기에·영국·프랑스 등을 공격하는 데 썼다.

당시 독일 군사연구협회 직원이던 베르너 오젠베르크는 사상검증이 끝난 과학기술자 명단을 작성해 뒀다. ‘오젠베르크 리스트’로 불리는 이 명단은 종전 직전 본 대학 화장실에서 발견돼 연합군 손에 들어갔다. 종전 직후 미국은 이 명부를 바탕으로 독일 과학자들을 줄줄이 모셔오는 페이퍼클립 작전을 수행했다.

‘로켓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를 비롯한 로켓 과학자 127명이 45년 6월 첫 번째로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입국했다. 7명의 합성연료 기술자와 86명의 항공기술자가 뒤를 이었다. 전쟁 내내 연합군을 골탕먹였던 암호·통신 전문가 24명도 합류했다. 처음엔 1년 계약직으로 미국 땅을 밟은 이들은 곧 미국 시민권자가 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46년부터 90년까지 계속된 이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은 1600여 명의 독일 과학기술자를 받아들였다. 그 덕에 로켓은 물론 제트기와 통신·암호·합성연료 등 다양한 분야의 옛 독일 기술을 흡수했다. 10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는 신기술 특허와 아이디어도 얻었다.

소련도 46년부터 ‘오소아비아힘 작전’이라는 유사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수천 명의 독일 전문가를 소련으로 데려가 첨단기술을 얻어냈다. 미국이 독일 과학자들을 자국민으로 받아들인 데 비해 의심 많은 소련은 주요 프로젝트를 외국인에게 맡기지 못했다. 기술 흡수가 대충 끝나자 51년까지 돌려보냈다. 체제의 한계다. 물론 1년 정도 놀려서 최신 정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브라운의 조수였던 헬무트 그뢰트루프를 비롯한 250명의 로켓 기술자도 소련으로 이송됐다. 페네뮌데 연구소 인력의 상당수는 미국이 차지했지만 로켓 공장은 소련 몫이었다. 소련은 이를 통째로 뜯어 스탈린그라드 동남쪽 카푸스틴 야르에 로켓연구소를 세웠다. 그뢰투르프는 여기서 소련 과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V-2 로켓을 복제해 소련 최초의 로켓 R-1을 만들었다.

로켓 R-1은 소련 핵 미사일과 우주개발의 모태다. 코롤료프가 57년 5월 첫 발사한 세계 최초의 대륙간 탄도미사일 R-7 로켓을 개발했기 때문이다. 그해 10월 4일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발사돼 R-7은 미국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시작된 미·소 우주개발 경쟁이 91년 소련 몰락 때까지 계속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소 로켓사는 이제 한국 우주개발사까지 연결됐다. 지난달 30일 발사에 성공한 우주발사체 나로호의 1단 로켓이 R-1의 후예인 러시아제이어서다. 로켓 역사에선 남의 것을 빌려 쓰거나 베끼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 다음에 어디까지 계속 발전시키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이는 한국 과학계의 과제이기도 하다. 나로호 발사는 거대한 경쟁의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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