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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부인가, 자모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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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일러스트=강일구]
김종수
논설위원

아직 출범도 하지 않은 박근혜 정부에 대해 벌써부터 여러 가지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선 불안하다는 것이다. 선거를 치를 때는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큰소리쳤는데 막상 당선되고 보니 뭘 준비했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는 것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구성이 늦어진 것은 물론 운영도 어설프기 짝이 없다. 새 정부 조각의 첫 단추인 총리후보 인선도 뚜껑을 열어보니 제대로 검증조차 하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만기친람(萬機親覽)형 제왕적 대통령의 기운을 풍긴다는 것이다. 초기 인사의 비밀주의는 외부 청탁과 압력을 배제하고 당선인의 의중을 십분 반영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새 정부가 펼칠 구체적인 정책마저 당선인의 개인적인 정보와 판단에 좌우되는 것은 곤란하다. 그 정보와 판단이 자칫 잘못되기라도 하면 국정에 심각한 혼란과 낭비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통령 개인의 불행이기도 하지만 국가적으로도 불행이다.

 그런데 작금에 인수위에서 벌어지는 행태를 보면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박 당선인은 인수위 업무보고에서 거의 모든 정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지침’을 내린다. 그동안 인수위와 정부 일각에서 논란이 됐던 쟁점사안에 대해서도 일일이 ‘방침’을 정해줬다. 말 많던 기초연금 재원에 대해선 “어디 (국민연금 등) 다른 데서 빼오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세금으로 해야 되겠지요”라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현실성에 의문이 제기됐던 ‘행복주택’ 프로젝트도 공약대로 추진한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시행 시기와 준비 기간을 두고 논란이 됐던 가계부채 해소 문제도 “새 정부를 시작하면 즉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대기업의 불공정 거래 개선에 관해서는 “백화점 납품업체 사장을 만났더니 백화점 판매수수료를 너무 많이 떼 간다고 하더라”면서 “업종별로 판매수수료, 판매장려금을 포함해 다각적인 개선책을 검토해 달라”고 정말 ‘구체적으로’ 주문했다. 그러면서 “제가 (공약이나 정책을) 약속하면 여러분(인수위, 정부)은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것도 여러 차례나.

 이렇게 되면 인수위건 정부건 모두 당선인의 입만 바라본다. 더 이상의 논의나 이의제기는 없다. 당선인이 점잖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그건 단순히 개인적인 생각이나 의견이 아니다. 그것은 최종 결론이자, 정부의 방침이며, 차기 대통령의 ‘명령’이다. 인수위와 정부가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제 자칭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는 인수위원들과 정부 관료들은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아니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당선인(대통령)이 정해준 대로 따를 뿐이다. 그다음엔 알아서 긴다. 당선인이 언급한 분야에선 정부건, 유관단체건, 관련 기업이건 찍소리도 하지 않고 엎드려 기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대목에선 해석과 추측이 난무한다. 시간이 흘러 이런 의사결정 구조가 고착되면 더욱 심각한 현상이 일어난다. 장관이나 공무원들은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은 아예 보고하지 않거나 대통령에게 결정을 미룬다. 자칫 중뿔나게 나섰다가 대통령의 의중에 어긋나기라도 하면 낭패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언급한 사안은 ‘BH 중점관심사항’이란 딱지가 붙어 부리나케 추진되고, 그러지 않은 사안은 방치되거나 묻혀버린다.

 세종시는 박 당선인이 약속을 지킨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실제 세종시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그 약속을 지키느라 물고 있는 국가적인 낭비와 비효율이 얼마나 큰지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그런 불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당선인이 약속했으면 정부는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인은 선거에서 이겼을 뿐 전지전능(全知全能)한 무오류(無誤謬)의 신의 지위에 오른 것은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도 시간이나 인간적인 역량이 만기친람식 국정운영을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책임과 권한을 총리와 장관에게 위임할 때 지도자의 역량은 더 빛난다. 만기친람으로 말하자면 이명박 대통령만 한 지도자가 없다. 그는 4대강 사업이든 원전 수주든 주요 국가사업에 대해 본인이 장관들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모든 것을 직접 챙겼다. 전쟁을 수행하는 총사령관이 사단장과 중대장, 말단 소총수 역할까지 도맡아 하려 했다. 그 결과는 비참했다. 일이 잘 풀리면 다행이지만 잘못되면 모든 비난이 대통령에게 집중됐다. 이렇게 집중포화를 맞고 나면 국정을 이끌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박 당선인이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의욕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국민들의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럴수록 한발 물러서는 지혜로운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정의 큰 방향을 제시하는 정도로 족하다. 중소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하면 될 일을 백화점 수수료 같은 구체적인 방법론까지 세세히 챙기다 보면 뜻하지 않은 부작용과 시스템의 불통을 부른다. 박 당선인은 선거 과정에서 ‘자애로운 어머니 리더십’을 강조했다. 그런데 요즘 그의 얼굴엔 범접하기 어려운 엄부(嚴父)의 표정이 어른거린다. 새 정부가 출범해도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당장 나아지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박 당선인에게 만기친람의 권위보다는 고통을 공감하고 갈등을 품어주는 자모(慈母)의 리더십을 기대하지 않을까.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