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페미니즘과 과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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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과학학(Science Studies.과학과 유관한 총체적인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은 '과학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사회구성주의 이론에 바탕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대부분의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지식의 산물을 이해하는 데 과거 19세기에 팽배했던 실증주의보다는 사회적 역동성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 공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막상 과학사회학자들은 과학 자체에는 무비판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반면 과학학의 인접분야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자세를 취할 뿐 아니라, 특히 페미니즘 과학학의 주장에는 무시로 일관하고 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과학학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과학사가인 론다 쉬빙거는 페미니즘 과학(기술)학의 동향을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첫째 역사상 무시되어 왔던 여성과학자들의 위상을 복원시키는 연구, 둘째 과학제도의 발달에서 여성을 배제해 왔던 역사적 이유를 규명하는 연구, 셋째 과학지식의 성적 구성과 '성과학'의 이데올로기를 규명하는 연구. 넷째 과학실험과 실천의 규범 및 방법에서의 남성중심적 과학관의 규명이다.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들은 다양한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는 과학의 전통적인 인식론을 공격하고 있다.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과학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지는 객관적 지식으로 가치중립적인 순수한 객관적 진리를 확신한다고 여겨져 왔다.

이에 대해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들은 남성중심적인 과학의 지식에 여성의 경험을 포함함으로써 객관성 과학을 추구할 수 있다고 봤다. 그들은 전통적 실증주의에 근거한 엄밀한 과학방법이 아니라 인식주체의 관점과 입장까지를 포괄하게 되면 과학과 자연을 더욱 더 잘 볼 수 있어 매우 강한 객관성을 띨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하러웨이에 버금가는 페미니즘 과학학자인 에블린 폭스 켈러는 유전학자인 바버라 매클린톡의 전기에서 "매클린톡의 성공적인 과학은 당시 남성 주도적인 유전학자 사회가 주장했던 편협한 방법을 넘어서서 탈성차(脫性差)의 접근을 시도한 점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매클릭톡은 유전자가 유기체를 결정한다는 남성들이 주도한 유전학의 방법과 원리를 넘어서,옥수수의 변이를 유기체와 유전자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는 독특한 관찰방법으로 '점핑유전자(jumping gene)'라는 가설을 제창해 오랜 무시 끝에 1983년 노벨상의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이러한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학사회학의 지면에는 페미니스트들의 의식이 결여돼 있거나 지나치게 남성우월주의 수사가 넘쳐나고 있다.

여전히 과학사회학자들과 노선상의 차이를 보이는, 고립된 듯한 페미니즘 과학학의 위상은 어떻게 설명 가능할까?

그런 고립도 전통적으로 남성 주도의 과학의 세계에서 소외받은 여성과학자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물론 페미니즘 과학학 학자들만이 과학의 인식론을 개혁하려는 유일한 그룹은 아니다. 과학사회학의 노선에 회의적인 많은 학자들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부정과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이론적 틀의 모색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혜경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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