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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 합의하에 성관계 맺은 꽃뱀女, 돌연…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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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성추행 누명을 쓴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의 한 장면.

#판결 1. 2010년 10월. 서울 남부지법은 친딸(사건 당시 15세)을 성폭행하고 임신시킨 40대 노모씨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5년간 신상정보 공개, 7년간 전자발찌 부착도 명령했다. 같은 해 12월 항소심에서 서울고법은 이씨의 형량을 징역 7년으로 줄였다.
#판결 2. 2012년 12월. 수원지법은 내연녀의 딸(사건 당시 16세)을 성폭행한 50대 이모씨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10년간 신상정보 공개, 20년간 전자발찌 부착도 명령했다.

두 사건의 판결은 친딸과 내연녀 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2년 사이 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크게 늘어났다는 점이 주목된다.
최근에는 성범죄가 살인죄와 형량이 비슷하거나 더 높은 경우도 있다. 지난해 12월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법관회의에서 살인죄에 대한 양형 기준을 높이자는 의견이 나온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현행 대법원 양형 기준에 따르면 ‘참작할 동기가 있는’ 살인의 양형 기준은 징역 4~6년이다. 그러나 13세 미만 강간에 대한 권고형량은 8~12년이다. 살인죄가 여타 범죄의 형량을 결정하는 기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형량 아무리 높여도 만족 못 해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성인대상 성범죄의 양형 기준을 올리는 방안을 논의했다. 여론의 뒷받침으로 미성년자와 장애인에 대한 양형 기준을 먼저 끌어올리고 보니 성인 대상 성범죄와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성범죄 단죄 법률이 새로 생기거나, 법정형과 양형 기준이 모두 높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쏠린 아동 대상 성범죄에 대한 형량이 높아지면 성인 대상 성범죄 형량도 따라가고, 살인 등 다른 범죄의 형량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형량을 높이면 과연 범죄가 줄어드는지에 대한 의문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형사정책연구원 김유근 연구위원은 “특정 범죄만 형량이 높아지면 일종의 착시 현상이 생겨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분별력이 떨어진다”며 “최근에는 성범죄 형량을 아무리 높여도 사람들이 만족하지 않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형량을 높이는 게 범죄 억제에 효과가 있는지는 의문”이라며 “성범죄를 실제로 줄이려면 신고율 향상, 상습적 성범죄자 치료 등 사회정책적인 대안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관련 법이 너무 많고 복잡해 정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국회에는 지난해 9월부터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 개정안만 20여 건이 제출 됐다. 성범죄 관련 법률도 형법 외에 ‘성폭력 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아청법’ 등 여러 개가 있다.

류여해 사법교육원 교수는 “같은 성범죄에 대해 법무부·여성가족부 등 여러 부처에서 법률이 만들어지는 것은 문제”라며 “사회적 공분을 사는 성범죄가 생길 때마다 법을 새로 만들고 형량을 높이는 것은 법의 명확성을 오히려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연세대 법무대학원 박상기 교수도 “우리 성범죄 법률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처벌 조항이 이미 충분하며 처벌 강도 역시 더 이상 높이기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법이 양산되는 과정에서 모호한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범죄임을 의식하지 못한 채 전과자를 양산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 과정에서 준법 의식이 떨어지면 결과적으로 애초에 보호하려 한 법익조차 훼손된다는 것이다. 아청법 제2조 5항의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의 정의가 대표적인 논란거리다. 현행법의 아동·청소년으로 ‘인식될 수 있는’이라는 부분이 너무 광범위하다며 논란이 일자 개정안은 여기에 ‘명백하게’라는 단어를 추가했다.

우리만화연대 신유경 사무국장은 “여전히 실존 인물이 아닌 만화 속 창작물이 포함돼 범위가 너무 넓고 모호하다”며 “창작자의 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문제도 생긴다”고 말했다. 김유근 연구위원은 “미국에서도 아동 음란물 제작자와 소지자를 모두 가혹하게 처벌하지만 어디까지나 실존 인물을 이용할 경우”라며 “창작물까지 과도하게 처벌하고 모호하게 처리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긴다”고 말했다.

성희롱 관련 법규도 전과자 양산 우려

2007년 초 일본에서 개봉된 영화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それでもボクはやってない)’. 스오 마사유키(周防正行)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치한 혐의를 받은 주인공이 무죄입증을 위해 노력하나, 강경 일변도인 일본 사법시스템에 좌절한다는 내용이다. 사회적 공분을 사는 치한 범죄의 경우 가해자(피의자)에 대한 징벌의식이 강한 나머지 ‘무죄추정의 원칙’이나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을 고려한다’는 근대 사법의 원칙마저 사라지는 역설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혐의 입증을 위해 피의자의 집에서 성인 잡지·영화를 찾아 증거로 삼는 관행 ▶혐의를 부인하면 혹독한 대우를 받지만 인정만 하면 실제 범죄자라도 벌금과 합의금으로 손쉽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허점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런 허점을 이용하도록 부추기는 변호사와 법조 브로커 등의 존재가 암시된다. 모호한 법률과 지나치게 강력한 처벌 사이에서 이권을 목적으로 합의를 강요하거나 편법을 안내하는 이들은 일종의 ‘공포사업자’로 부를 수 있다.

소수지만, 처음부터 금품을 목적으로 성범죄를 악용하는 꽃뱀의 문제도 자주 지적된다. 24일 서울중앙지검은 경찰관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맺고도 강제로 성폭행당한 것처럼 고소한 혐의(무고)로 황모(27)씨를 불구속 기소했다. 황씨는 2011년부터 서울과 경기도의 경찰관을 노려 같은 수법으로 돈을 챙겨오다 적발됐다.

법 체계가 정리가 안 돼 생기는 혼란은 ‘성희롱’도 마찬가지다. 김태훈 변호사는 “성범죄와 달리 피해자의 느낌만으로도 처벌이 가능한 성희롱 관련 법규가 불필요하게 전과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소송 전에 피해자와의 합의를 유도하는 일이 많고, 브로커 등 공포사업자가 개입하게 된다. 드물지만 꽃뱀 같은 악용사례도 생긴다. 김 변호사는 미국처럼 성희롱을 민사상 문제로 처리하거나, 유럽처럼 수사 전에 행정기관이 조정을 하는 사전심사 제도를 도입하는 게 대안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곽금주(심리학) 교수는 “우리 사회가 아직도 성범죄, 특히 아동·청소년에 대한 범죄에 대한 대응책이 부족하기 때문에 법률을 더 강화할 필요는 있다”고 전제하고 “문제는 실태를 잘 파악해 현실에 맞는 처벌을 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승녕·노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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