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美검사 "배심제, 말싸움 잘하는 한국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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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스티븐 김 검사

#1. 2009년 가을 미국 워싱턴주의 한 배심재판 법정. 약국을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부부가 “강도를 당했다”며 법원에 신청한 배심재판 사건이 진행 중이었다. 피고인석에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백인 남성이 약국을 약탈한 권총강도 혐의자로, 검사석에는 한국계 미국인 검사가 앉았다. 법정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동안 판사는 단 한 번도 증인들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배심원들은 사흘에 걸친 심리 끝에 만장일치로 1급 강도죄로 판단했다.

 #2. 그 한국계 미국인 검사가 지난해 여름 한국의 한 지방법원 형사법정에 나타났다. 강도 혐의자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다. 9명의 배심원들은 변호인과 검사의 증인 심문 과정을 지켜봤다. 중간중간 판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피해자는 얼마나 다친 겁니까?” “저번에는 많이 안 다치셨다고 했죠?” 배심원들은 재판이 끝난 지 1시간 만에 평결을 내놓았다. 만장일치는 아니었지만 무죄 의견이 우세했다. 한국 판사는 배심원단의 결정을 참고해 판결을 내렸다.

 미국 시애틀 킹카운티 검찰청의 스티븐 김(38·한국명 김형원) 검사. 한국과 미국의 배심재판을 직접 경험한 그의 소감은 “두 나라의 배심재판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민재판 형태인 배심원제는 12~13세기 영국에서 시작돼 근대 미국에서 꽃핀 제도다. 미국에선 역사가 수백 년이 됐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올해로 시행 6년째에 불과하다.

김 검사는 그러나 배심제는 한국의 국민정서에 딱 맞는 제도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말싸움을 잘해요. 재판은 말싸움 속에서 진실을 찾는 과정입니다. 특히 속내를 감추고 언쟁을 피하는 일본인들과는 다릅니다.”

 유·무죄를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각이 선 법정 상황(adversarial system) 자체가 논쟁을 즐기는 한국인에게 딱 들어맞는다는 거였다. 실제로 한국의 국민참여재판은 증가 추세다. 2008년 64건, 2009년 95건, 2010년 162건, 2011년 253건을 기록했고 지난해에는 274건으로 확대됐다. 지난 23일 대법원 국민사법참여위원회는 국민참여재판의 최종 형태를 결정해 발표했다. 이번 결정대로라면 올해 말부터 권고적 효력만 갖던 배심원 평결이 사실상 기속력(羈束力)을 갖게 된다. 또한 재판부 직권으로, 또는 검사의 신청으로 참여재판을 열 수 있도록 해 신청 주체의 범위도 넓혔다.

 김 검사는 “한국의 배심제도는 차츰 진화하고 있다”며 반색했다. 하지만 쓴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대륙법 체계인 한국 사법제도의 틀에 영미법 체계의 증거법정주의 원칙을 무리하게 끼워맞추려다 보니 판사의 제왕적 권한이 배심재판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배심재판에선 피고인과 증인 심문 때 판사가 질문을 던지는 일이 거의 없어요. 평결에 영향을 줄까 봐 얼굴 표정까지 조심하거든요.”

 재미동포 2세인 김 검사는 워싱턴주립대 로스쿨을 거쳐 2002년 미국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동안 100회 넘는 배심재판을 수행했는데, 그중 무죄판결은 여섯 번뿐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시니어 검사’(한국의 부장검사급)인 그는 지난해 1월 법무연수원 초청으로 입국해 현직 검사들과 로스쿨 학생 등을 대상으로 배심재판 관련 강의를 해왔다.

심새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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