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자존심과 그의 우유부단함 안타까운 이중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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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호 24면

사진 연극열전

이것은 조금 별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이라는 이름을 끝내 얻지 못한 채 먼지처럼 흩어져야 할 어떤 사랑. 뜨겁게 타오르거나 아프게 꺾여버릴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그저 공기처럼 내내 깃들었던 사랑.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 2월 11일까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톱스타 배종옥과 조재현, 정웅인 등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연극 ‘그와 그녀의 목요일’은 대중연극의 본산 연극열전과 예술의전당이 합작한 작품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 TV스타들의 연극출연은 간혹 있는 일이지만 상업적 성격이 두드러진 무대의 얼굴마담인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 간만에 중장년 관객을 소극장이 미어터지게 불러 모은 연극이 신파극이나 스타의 이름값에 기댄 평범한 무대가 아닌 독특한 연출실험이 돋보이는 스타일리시한 작품이라 반갑다.

번역극을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재탄생시키는 능력이 탁월한 황재헌 연출이 프랑스 작가 마리 카르디날의 장편소설 『샤를르와 룰라의 목요일』에 그려진 미묘한 남녀의 심리에 연극적 디테일을 가미해 세련된 무대를 빚어냈다. 당초 지난해 12월 30일까지 공연예정이었으나 중장년 관객들의 열띤 호응 덕에 2월11일까지 앙코르 공연으로 이어가고 있다.

국제분쟁 전문기자 연옥과 화려한 입담의 유명 역사학자 정민은 대학 시절 만나 ‘결혼 빼고 다 해 본’ 사이. 우정과 사랑 사이 어디쯤의 미묘한 관계를 가늠하지만 그 ‘어디쯤’을 한 번도 정색하고 따져본 적은 없다. 젊은 날 동거해 아이까지 낳고 스스럼없이 휴가를 함께 떠나기도 하는 일견 쿨해 보이는 중년의 이성 친구다. 암 선고를 받고 현업에서 은퇴한 연옥은 주변을 정리하지만 사정을 전혀 모르는 정민의 제안으로 매주 목요일마다 만나 자신들만의 추억이 담긴 특별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들의 대화는 ‘비겁함’ ‘역사’ ‘죽음’ 등 거창한 철학적 성찰과 함께 시작되지만 결국 그런 대주제도 두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말다툼으로 수렴되고, 묻어둔 과거의 상처를 들춰 가는 사이 서로의 속내를 확인하며 둘은 관계를 직시하게 된다.

‘결혼 빼고 다 해 본’ 그들은 친구? 연인?
사방이 객석으로 둘러싸인 무대. 배우의 앞모습에만 익숙했던 관객은 예상치 못한 동선으로 불쑥불쑥 등장하고 퇴장하는 배우들이 때론 객석을 향해 말을 걸고 때론 뒤통수만 보여주며 이어가는 빠른 전개에 당황하면서도 강하게 빨려든다. 유일한 무대장치인 긴 사각 테이블은 늘 좁지만 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 만나온 두 사람의 관계를 상징하는 장치. 80년대 군부독재에 앞장서 맞섰던 광주 출신의 미래지향형 여자와 3S정책에 휘둘려 프로야구나 즐기며 도서관에서 책만 보던 현실안주형 서울 남자는 그 별것도 아닌 경계선을 결코 넘어본 적이 없다.

30년간 평행선을 그려 왔지만 죽음을 앞두고 그 경계선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 두 남녀. 서로를 구속함 없이 ‘멀리 떨어져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이였던 이들의 관계는 과연 친구였을까, 연인이었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시종일관 냉정하게 쏘아붙이는 여자와 재치 있는 웃음으로 눙치는 남자의 대립이 긴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분신 격인 젊은 남녀배우가 표상하는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교차되는 연출은 묘하게 짠하다. 과거의 오류가 현재에 똑같이 되풀이되는 상황에도 속수무책인 것은 50대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만 20대인 내가 변함없이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듯.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독백하면서도 마주해서는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여자와 그런 그녀를 밀지도 당기지도 않고 그냥 비겁하게 주변만 맴돌아온 남자. 죽음 앞에서야 겨우 “우리 관계는 대체 뭐냐” 물을 수 있었던 연옥에게 “왜 단 한 번도 솔직하지 못하냐”고 되묻는 정민의 언쟁은 결국 두 사람이 영원한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한다. 하여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관계는 여전히 이름이 없는 채다.

전쟁터로 돌아간 연옥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온 두 사람의 30년 역사를 담은 사진들이 무대 양쪽의 스크린을 채우자 끝내 터지는 정민의 눈물에, 저들의 오래된 사랑이 너무 아쉬워 질문해 본다. 만약 한 번이라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구속됐었다면 어땠을까. 외견상 아이까지 낳고 헤어진 불편한 남녀관계는 이미 오래 전에 미움으로 또는 무관심으로 퇴색하지 않았을지. 이름이 없었기에 30년 세월을 버티고도 유효기간이 남았다면, 이름이 없더라도 위대한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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