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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무게, 향기로 만드는 ‘우리만의 커피’ 맛보러 오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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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면

최근 문을 연 카페 ‘블라인드’에서 시각장애인 바리스타들이 포즈를 취하며 환하게 웃었다.

시각장애인 커피 바리스타들이 카페를 창업했다. 충청남도시각장애인복지관(관장 김병환, 이하 복지관)은 11일 오전 천안역 지하상가에 시각장애인 바리스타 커피숍 ‘블라인드 1호점’을 공식 오픈했다.

지난해 충남문화산업진흥원(원장 전성환)에서 ‘천안 원도심 활성화를 위한 창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카페 창업자 공모에 선정돼 영업을 시작하게 됐다. 여성시각장애인들의 사회참여와 경제활동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로 마련된 ‘블라인드’에서 일하는 바리스타 4명은 모두 중도시각장애인들이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전맹 한 명과 약시판정을 받은 시각 장애인 한 명이 한 조를 이뤄 3일씩 번갈아 가며 근무한다. 복지관에서는 2011년 3월부터 바리스타 교육과정 개설한 후 4기까지 총 11명의 바리스타 교육생을 배출해냈다. 취업정보팀의 이학승(39) 팀장은 “처음에는 홍보가 안 돼 모집이 어려웠는데 11명의 교육생 중 8명이 합격하고 나머지는 지난 12월 말에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 팀장은 “여성 시각장애인들은 다른 일이나 취미활동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몰입하는 능력이 대단하다. 3개월의 교육 과정을 정말 열심히 했다. 일할 곳이 생기고 우리들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점에 무척 만족스러워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천안역 지하상가에 위치한 ‘블라인드’ 전경.

커피 바리스타가 되어 나만의 카페를 운영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다. 바리스타 자격증은 커피 만들기 이론은 물론 실습까지 오랜 수련을 해야 취득할 수 있는 자격증이다. 일반인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을 여성 시각장애인들은 어떻게 도전하여 취득하게 됐을까? 이들은 한결같이 ‘일반인보다 더 예민한 감각과 집중력’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대신 소리와 무게, 맛과 향기로 자신만의 커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장점이자 자부심이 됐다.

강미영(56)씨는 왼쪽 시력을 먼저 잃은 후 녹내장으로 오른쪽까지 시력을 잃게 되자 2년 동안 집에 칩거한 채 전혀 외출을 하지 않았다. 우연히 복지관에서 온 우편물을 받고 점자와 보행을 새롭게 익히면서 자신감을 얻게 됐다.

강씨는 “지도강사님의 ‘이렇게 하라’는 말씀이 가장 어렵고 힘들었다. 지금이야 무게를 느끼기 때문에 쉬워졌지만 처음엔 우유 조절하는 일이 어렵고 실수가 잦아 혼자 많이 울었다”며 “예전엔 커피 맛이 모두 비슷하게 느껴졌는데 이젠 신선한 커피가 어떤 맛인지 감별할 수 있다. 바리스타 교육을 받으며 커피처럼 향기로운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쪽 눈을 실명해 6급 장애 판정을 받은 강순천(51)씨는 “우유가 들어가는 카푸치노, 고구마라떼, 카라멜 마키아또를 가장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다. 표준 레시피가 있지만 조금씩 나만의 레시피를 갖게 되고 손님들의 반응도 좋다”고 말했다. 강씨는 “그동안 ‘어떻게 살까’하며 막막해 하다가 이젠 ‘어떻게 변하게 될까’를 생각한다. 커피를 만들면서 그동안 상처받았던 세월을 보상받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커피의 맛과 향에 매료돼 바리스타에 도전했다는 이들은 전담 지도 강사의 지도 아래 커피 만들기뿐만 아니라 다른 노력도 부단히 해왔다. 청결유지는 물론 서빙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커피숍의 동선을 익히는 연습까지 수없이 반복해 몸에 익혔다.

이들은 “손님들이 내가 만든 커피를 ‘맛있다’고 말해 주실 때 가장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자극을 많이 받고 간다.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손님도 많다. 커피숍 ‘블라인드’가 있는 지하상가는 유동인구가 적은 편이지만 손님들에게 신선하고 저렴한 커피로 친근하게 다가갈 예정이다. 앞으로는 지하상가 내의 상인들에게는 핸드폰으로 주문을 받아 배달도 할 계획이다.

  글·사진=홍정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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