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 대전환 신호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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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운드 타결 이틀 뒤인 16일 양곡유통위원회는 내년 추곡 수매가를 놓고 5시간도 넘게 격론을 벌였다.결국 농민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표결에 들어갔는데 19명의 위원 중 추곡 수매가를 인하해야 한다는 의견이 13명이었고 인상해야 한다는 위원은 한명도 없었다.

양곡유통위원회의 내년 추곡 수매가 인하 건의는 농산물 시장을 더 개방할 수 밖에 없는 뉴라운드 시대에 농업정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쌀시장 추가 개방에 대비하려면 정부의 가격보조금을 줄여야 하고,늘어나는 재고 때문에 증산 위주의 양곡정책이 한계에 부닥친 현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농민단체들은 “현재 수매가도 생산비에 못미치는데 올리지는 못할 망정 어떻게 내릴 수 있는 지 모르겠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인하 13:동결 2:기권 4:퇴장 =오후 4시에 열린 양곡유통위원회에서 생산자 대표들은 “쌀농사에 소득의 상당 부분을 의존해야 하는 농촌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추곡 수매가를 현재보다 낮추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하지만 소비자단체와 학계 인사를 중심으로 인하론이 우세했다.이들은 쌀 재고가 계속 늘고 있고,2004년 쌀시장 개방 재협상을 앞두고 가격 보조금을 줄여야 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결국 전국농민회총연맹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투표가 이뤄졌다.19명의 위원 가운데 4명이 기권한 가운데 15명이 투표에 참여했으며,13명이 인하 안을 내고 두명이 동결하자는 의견을 냈다.폭을 적어내는 방식으로 15명이 투표한 결과 ^-5%가 9명^-3% 1명^-4% 2명^-5∼7%가 한명으로 나타났다.

◇쌀 산업 현황=국내 쌀 재고는 식생활 변화로 소비가 계속 줄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흉작을 거둔 1996년을 제외하곤 해마다 증가해왔다.현재 9백89만섬인 쌀 재고가 올해 풍작으로 내년에는 1천3백70만섬으로 추정돼 처분하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2004년 쌀시장 개방 재협상 일정도 추곡 수매가를 내리도록 건의하는데 영향을 미쳤다.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각료회의 협상 결과 농산물의 대폭 개방이 불가피해졌기 때문이다.93년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에서 쌀시장 완전 개방을 10년동안 유예한 한국도 새로 출범한 뉴라운드 체제 아래선 더 이상 개방을 미룰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만약 쌀 시장이 개방된다면 현재와 같이 쌀의 국내외 가격차가 벌어져 있는 상황에선 관세를 매기더라도 수입 쌀과 경쟁하기 어려워진다.UR 협상 당시 3∼4배였던 쌀의 국내외 가격차는 현재 6∼7배로 벌어진 상태다.

또 이번 WTO 농산물 협상에서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국내 보조금을 ‘실질적’으로 감축하도록 결정됐기 때문에 대표적인 국내 보조금인 추곡수매 예산의 대폭 축소가 불가피해졌다.

◇소득 보조로 전환해야=추곡 수매가는 농림부가 양곡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확정한 뒤 국회에서 최종 확정된다.그러나 양곡위원회의 건의는 추곡 수매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쳐왔기 때문에 내림폭이 어떻게 정해질지는 몰라도 최소한 올해보다 내리는 방향은 확실해 보인다.

문제는 농민들의 반발이다.지난 13일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격렬한 시위를 벌였던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농민단체는 이번 양곡위의 결정에 대해 실력 행사로 맞설 가능성이 크다.

정부는 추곡 수매가를 내리는 대신 논농업 직불제 보조금 등 WTO 규정에 어긋나지 않은 소득 보조를 늘릴 방침이다.하지만 ha당 25만∼35만원에 불과한 직불제 보조금을 더 올리더라도 농민들의 소득감소분을 보전할 수 없어 정부는 고심하고 있다.

양곡유통위원회는 WTO체제하에서 쌀 산업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격지지 정책에서 소득지원 정책으로 전환해야 하며,논농업직불제 보조금 단가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정철근 기자 jcom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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