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의 스타로지] '프로포즈'성의 여제 이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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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한밤중에 길을 잃는다. 하늘엔 성근 별. 안개 속을 헤엄치고 승냥이 울음에 귀를 막으며 사면을 측량하니 저 멀리 중세의 성(감옥인가?) 이 나타난다.

빼꼼히 문을 열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발을 내딛는다. 거기엔 이미 불빛을 따라 흘러온 남녀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도시를 탈출한 노예들이다.

어리지도 않고 늙었다고도 할 수 없는 그들 앞에 이윽고 풍채 있는 마담이 나타난다. 그녀는 검은 옷을 입었다. 제사장인 그녀는 초대된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내 말을 건다.

제의적 분위기가 반전하는 건 바로 이때다. 연극배우 박정자씨 같은 침전된 발화가 나옴 직한데 그녀에게선 엉뚱하게 부유(浮遊) 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환호하는 노예(?) 들. 길게 하지 않는 그녀의 말에는, 그러나 주문의 힘이 살아 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상승의 주문(呪文) 은 하강의 주문(注文) 으로 바뀌었고 극장은 시장으로 개조되었다. 거리에서는 목소리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입을 벙긋거리며 몸을 흔든다.

노래는 '부르는' 것이다. 그녀의 성에선 이 잊혀진 명제가 살아 꿈틀거린다. 그들이 '부르는' 것은 자유와 평화, 무엇보다 사랑의 소중함이다. 그들은 휴식 같은 친구에 목말라 있다. 들뜨지 않을 도리가 있는가. 그녀의 성에는 진중한 그녀의 목소리가 있고 초대된 이들의 싱싱한 목소리가 있고 자발적 죄수들의 간절한 목소리가 있다.

그녀는 내게 '연구'대상이다. 중간보고를 요약하면 이렇다.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눈빛을 보면 알 수 없으나 그 눈빛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그 한 사람을 위해 그녀는 토요일 한밤중, 혹은 일요일 신새벽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파티를 연다. 그녀는 그 단 한 사람의 연인이 숲에서 길을 잃고 밤을 헤매다 마침내 그 성문을 열고 들어오기를 간구한다.

살다보면 길을 잃어야 길을 찾는다는 반어적 깨달음에 소름끼칠 때가 있다. 어느 해인가. 대학가요제에 초대하고 싶은 가수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녀가 맨 머리에 있었다. 어렵사리 그녀의 성을 찾아갔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이유는 "새로운 걸 보여줄 준비가 안 돼 있다"는 것. PD가 보기에 준비가 안 돼 있는 게 아니라 준비할 자세가 안 돼 있었다. PD의 집요한 설득 앞에 그녀는 무언의 집념으로 저항했고 결국 그녀가 이겼다.

이럴 때 PD의 태도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래 너 어디 잘 되나 보자", 그리고 나머지는 "대단하다. 뭔가 다르다"다. 그녀가 지금도 성주의 작위를 놓고 있지 않은 게 그 해답이다.

스타는 스타일을 갖는 존재이다. 스타일을 갖는 사람은 많아도 스타일을 고집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도대체 그녀의 카리스마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주저함 없는 깊이와 흔들림 없는 무게 정도가 미완의 해답이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 이 성은 도대체 언제 헐릴까? 성을 처음 설계하여 지은 박해선 프로듀서의 말이 나지막한 울림으로 남는다.

"이소라씨가 그만둔다고 할 때까지. 그때까지 계속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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