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와 궁합 맞는 와인? 아직은 못 찾았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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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해튼 대표가 카베르네소비뇽·메를로 등 네 가지 품종으로 만든 레드와인 콰르텟(4중주를 의미하는 음악용어)을 들고 있

미국의 최고급 와인 산지인 나파 밸리는 프랑스 와인에 뒤지지 않는 ?컬트 와인?으로 유명하다. 타닌이 강하고 보디감이 좋은 카베르네 소비뇽을 주 품종으로 하는 프랑스 보르도풍의 와인이다. 미국 와인은 기품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뒤집은 와인으로 레이블도 특이하다. 와이너리마다 기껏해야 연간 5만 병 이내로 한정 생산하는 희소성 때문에 가격도 비싸다. 이곳을 대표하는 와인 가운데 하나인 아리에타(Arietta) 역시 보르도풍의 깊은 맛을 낸다. 아리에타는 ‘작은 아리아’ 또는 ‘예술 노래’를 의미하는 클래식 용어다. 이 와이너리의 오너 프리츠 해튼(Fritz Hatton)이 16일 한국을 찾았다. 아리에타 와인 5종을 출시하면서다. 컬트 와인 못지않은 독특한 이력으로 눈길을 끈다. 미국 최고 명문 예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뒤 경영학 석사(MBA)까지 마쳤다. 미국 와인 업계에서 대표적으로 학벌 좋은 사람으로 불린다. 그는 와이너리 이전에는 줄곧 경매 업체에서 일했다.

그는 와인을 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라고 정의했다. 그는 ?와인을 함께 마시면 모든 사람이 구름 위에 붕 뜬 듯 기분 좋은 상태(elevated mental state)가 된다?며 ?흥미롭게도 와인과 클래식은 뇌의 같은 부분을 자극한다?고 설명했다.

와인의 매력에 대해 그는 “우아하게 취할 수 있는 술”이라고 강조한다. 이어 “와인은 음식과 궁합이 잘 맞아야 제맛을 느끼는 것처럼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하다. 와인은 우정(友情)을 쌓는 매개체라고 본다면 술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와인은 음식과 궁합(페어링)이 매우 중요한데 아쉽게도 아직 한국의 김치와 어울리는 와인은 찾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이날 함께 아리에타 와인을 시음한 음악평론가 장일범씨는 “베토벤 음악의 깊은 맛이 느껴진다. 때로는 ‘영웅’ 같은 파워와 박진감이 밀려오다가 조화로운 산미(酸味)와 빼어난 식감을 통해 형성되는 훌륭한 밸런스를 만날 수 있다. 마신 후 길게 느껴지는 여운은 오페라의 아리아를 보는 듯하다”고 평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예일대 학벌이 와이너리 오너가 되는 데 어떤 도움이 됐나.
“예일대에서 예술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삶을 성공으로 이끄는 게 돈이 아니라 열정이라는 것을 터득했다고 할까.”
(그에게 나이를 물었다. 즉답으로 33세라고 했다. 30대의 열정이 아직도 몸에 넘쳐서라는 것이다. 기사를 위해 진짜 나이를 알아야 한다고 했더니 이번에는 45세라고 한다. 신체적으로 40대 중반 정도로 활기차고 건강하다는 의미란다. 결국 실제 나이가 58세라는 답을 얻었다. 그는 나이 대신 태어난 날의 기록이라고 덧붙인다.)

-와인 산업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할지 몰랐다. 친구들은 대부분 투자은행(IB)과 같이 연봉이 많은 곳을 선택했지만 꽉 짜인 전통 산업에서 일하기는 싫었다. 대학 때 피아노 연주와 와인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이런 걸 활용하고 싶었다. 비영리 섹터, 일종의 사회적 활동이랄까. 미시간 호수가 보이는 고향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즐거움도 나누는 아주 작은 규모의 비즈니스였다. 생계는 와인가게 점원으로 해결했다.”

-경매회사로 이직한 계기는.
“와인가게 점원이던 1981년 크리스티에서 와인 경매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순간 이거라고 생각했다. 관심뿐만 아니라 열정을 다해 일할 수 있는 게 와인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친구들과 달리 빚(대학 등록금)도 없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돈을 번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직장이 뉴욕이라 친구 집 골방에 얹혀 살았다.”

-경매사라는 직업은 어떤가.
“미국에서 경매사(auctioneer)는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는 직업이다. 특히 하버드ㆍ예일대 졸업자가 한다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경매를 진행하는 도구(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경매가 재미있었다. 와인 카탈로그를 만들고 제값 이상을 받고 망치를 두드리는 게 즐거웠다.”
(크리스티에서 해튼은 무척 잘나갔다. 소위 ‘귀하신 몸’이었다. 미국 최대의 소매점인 자키의 경매 프로그램과 당시만 해도 유명세가 덜했던 나파 밸리 와인 경매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천재 경매사로 이름을 날렸다.)

아리에타 와인을 상징하는 것은 낡은 오선지 레이블이다. 와이너리 창업 후 1년 동안 레이블 디자인을 고심하던 해튼은 갖고 있던 악보를 뒤지다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악장(Opus111) 첫 페이지에 쓰여 있는 아리에타를 발견한다. 베를린 도서관을 뒤져 베토벤의 원본 악장을 카피했다.

-크리스티에서 성공 가도를 달렸던데.
?입사 후 얼마 안 돼 MBA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니저 자리를 제의받았다. 예술품 경매가 주 업종이라 임원 가운데 예술을 아는 사람이 많았고 사내 문화도 창의적이고 유머가 넘쳤다. 면접을 봤고 곧바로 북미 매니저가 됐다. 1년도 안 돼 와인 분야 임원이 됐다. 아시아 진출도 총괄했다. 1990년부터 3년간 도쿄에 본부를 두고 대만ㆍ싱가포르에 지사를 세웠다. 10년간 업무는 대부분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잠재했다. 3년간 안식년을 받아 유럽을 여행하며 피아노를 배웠다(실력은 준프로급이다). 기회는 열정만 있으면 언제나 따라온다. 내 길을 따라가면 된다.?
(통상 와이너리는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경영하는 가내 기업이 보통이다. 그만큼 와이너리 창업이라는 게 어렵다. 투자비뿐만 아니라 전통을 따지고 전문성과 인맥이 성패를 가름한다.)

-40대 중반이던 98년 창업을 했는데.
“92년 나파 와인 옥션에서 미국 와인업계의 전설인 존 콩스가드를 만난 게 기회였다. 안식년을 끝내고 95년 크리스티에 복직할 때 우연히 존이 ‘와인을 같이 만들어 볼래’라고 연락이 왔다. 솔깃했다. 우선 한 배럴만 만들어 보기로 했다. 시험적인 창업 비용이 포도 구입(200달러)과 제조비용(600달러) 등 800달러가 전부였다.”
해튼은 3년 후 아리에타를 설립했다. 현재 생산하는 와인은 5가지뿐이다. 한 해 전체 생산량이 약 2500케이스(1케이스당 12병, 약 3만 병)에 불과하다. 국내 판매가격은 화이트 16만5000원, 레드 16만∼38만원이다.

-고급 와인은 투자할 만한가.
“한 마디로 ‘노(No)’다. 일반인은 불가능하다. 고급 와인을 수집하는 취미에 그쳐야 한다. 투자를 하려면 보관 상태가 중요해 경매장에서 박스째 뜯지도 않고 주인만 바뀌는 식이다. 투자보다는 즐길 것을 권한다.”

-아리에타 성공 비결은.
“와인 경매에서 익히고 쌓은 식견과 인맥이다. 보르도와 비슷한 와인이라기보다 나 자신만의 와인을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중요한 원료인 포도는 미국 최고의 포도밭으로 꼽히는 허드슨 빈야드를 비롯해 나파 밸리의 고급 포도밭 오너와 담판, 최고 구획에서 생산된 포도를 사들였다. 미국 최고의 컬트 와인으로 손꼽히는 스크리밍 이글을 만든 앤디 에릭슨이 브렌딩을 맡고 있다. 이런 인맥을 어디서 확보하겠나.”
(인터뷰 내내 그와 함께 마신 레드 와인 ‘배리에이션1’은 시라(55%)와 메를로(45%)를 섞어 만든 보디감이 탄탄했다. 메를로 단일 품종으로 유명한 프랑스 포므롤 와인과 비슷한 흙 냄새와 ?꽁꼬름한? 동물성 향이 좋다. 미국 와인에서 좀처럼 찾기 어려운 향이다.)

글·사진 김태진 기자 tjkim@joongang.co.kr

프리츠 해튼 대표가 카베르네소비뇽·메를로 등 네 가지 품종으로 만든 레드와인 콰르텟(4중주를 의미하는 음악용어)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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