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의 소리] '에이즈 태풍'을 미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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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해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매춘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과 에이즈 예방은 생각조차 못하고 이 여성을 상대한 남성들이 뒤늦게 상대 여성의 감염사실을 알고 그 여성과 정부당국만을 탓하며 불안과 초조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사건이 그 하나.

감염인 양성애자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감염사실이 노출된 것에 격분해 그간 가까이 했던 동성애 상대를 무참히 살해한 살인사건이 또 다른 하나다.

최근 정부는 지난 한해 동안 4백명이 추가로 에이즈에 감염돼, 지난해 말까지 발생한 우리 나라 에이즈 감염자 수는 2천8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감염경로가 확인된 1천6백8명 중 97.4%가 성접촉으로 감염됐다. 이중 44.6%는 이성간 성 접촉으로, 29.8%는 동성간 성 접촉이 원인이라고 한다.

국내 에이즈 확산 초창기에는 동성관계나 외국여성을 상대한 이들이 주로 감염됐으나 이제는 국내 이성간의 성 접촉에 의한 감염이 가장 많은 것이다.

이는 에이즈가 더 이상 특별한 질병이 아니며, 성 행동이 가능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걸릴 수 있는 질병임을 보여준다. 이미 감염자가 2천명을 넘어선 데다 특히 남녀노소, 직업 구분 없이 감염되고 있어 확산 속도는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질 것이다.

더욱이 공식적으로 감염사실이 밝혀지지 않은 '숨은 감염자'들까지 감안한다면 더욱 그렇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에이즈 확산 저지를 위해 각 나라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칠 것을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에이즈 증가율을 25% 정도 더 낮추는 것이 목표다. 이는 정부와 민간.사회.여성단체.기업 및 독지가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미국에서는 처음 에이즈 환자가 보고된 지 4년 후인 1984년에 연방정부 차원에서 모든 주에 에이즈 예방을 위한 예산을 지원했고, 87년에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한 에이즈 예방교육체계를 확립해 학교를 중심으로 한 에이즈예방 교육을 시작했다. 또한 에이즈 정보 제공을 위한 핫라인 등을 만들었다.

우리 사회는 많은 사람이 에이즈에 감염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무관심하며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편견과 차별로 휩싸여 있다.

사회가 감염자를 도덕.윤리적으로 문란하며, 사회적 지탄을 받아 마땅한 집단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가족으로부터도 감염자가 동정을 받지 못한다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은 결국 감염자들로 하여금 감염사실을 계속 숨기고 은둔하게 해 결국 에이즈 확산을 부추기는 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에이즈는 전파경로가 잘 알려져 있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 에이즈에 대해 바로 아는 것만이 예방은 물론 감염자에 대한 편견도 없앨 수 있다.

청소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조직적이며 다양한 계몽교육이 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동시에 감염자들이 사회적 불편과 냉대를 겪지 않도록 하는 차원 높은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감염자와 비감염자가 잘 어우러져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라야 에이즈 태풍을 잠재울 수 있다.

이창우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