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MVP 3관왕 우즈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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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게는 꿈이 있었다.팔뚝에는 힘이 붙었고,때리는 공은 펜스를 넘겼다.그러나 흑인 소년의 발은 황소 걸음이었고,날아오는 공을 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먹고 살기 위해 슈퍼마켓에서 짐도 날랐다.

결국 1998년 당시 29살의 청년 타이론 우즈(32)는 어릴적 꿈을 찾아 태평양을 건넜다.그러나 한국야구도 거친 황무지였다.문화가 달랐고,그의 마음은 급했다.

그를 깨운 것은 한여름 태평양에서 불어온 뜨겁고 습한 바람이었다.고향 플로리다의 바다냄새에 익숙했던 ‘흑곰’의 본능을 자극했고,여름을 넘기면서 타구는 ‘펑펑’ 하늘을 갈랐다.초반 부진을 벗어난 우즈는 한국무대 데뷔 첫해 홈런왕(42개)을 차지,시즌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우즈는 올해까지 유일한 외국인 선수 4년차로 올해 올스타전 MVP·한국시리즈 MVP를 잇따라 석권,20년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MVP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코리안 드림’을 이룬 우즈와 부인 쉐릴(37)를 지난 1일 잠실구장에서 만났다.(우즈는 휴가차 지난 3일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한국에서 성공비결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항상 잊지 않는다.야구 가방에는 항상 성경책을 넣고 다니며 기도를 올리면서 시련의 순간을 기억한다.또한 쉐릴과 감독 킴(김인식)의 든든한 후원이 큰 도움이 됐다.쉐릴은 내가 95년 베네수엘라 리그에서 돌아와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뛸 때 한국을 추천했던 장본인이다.‘감독님’(우즈는 정확한 한국말을 썼다)은 훌륭한 분이다.데뷔 첫해 부진때도 ‘걱정말라’고 응원해 줬다.선수를 믿고,야구의 기본에 충실한 점에 감명받았다.”

-최근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연봉 70만달러의 거액을 제시했다는데.

“어떤 제안도 직접 들은 것은 없다.소문만 들었을 뿐이다.직접적인 제안이 온다면 가능성은 50대50이다.그러나 내 인생에서 돈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그리고 실력 테스트를 통해서는 일본에 가지 않겠다.”

-경기할 때 습관은 없나.

“팀이 이기는 것만 신경쓸 뿐이다.홈런보다 타점을 많이 올리려고 노력하는 편이다.웃기는 얘기지만 한국에 처음와서는 라커를 거의 매일 바꿨다.또한 헬멧에 일부러 송진가루를 묻혀 지저분하게 했다.한번은 매니저가 헬멧을 닦아놓았길래 너무 화가 나서 거의 싸울뻔 한적도 있다.물론 사과했다.”

-동료들 사이에 ‘짠돌이’로 소문났는데.

“원정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면 내 뒤에 서 있는 동료들 물건은 내가 계산한다.그렇다고 술먹으러 가는 것까지 내가 할 필요가 있나.돈 관리는 모두 아내에게 맡겼고 나도 용돈을 받아 쓰는 처지다.”

(이순간 쉐릴이 손을 번쩍 들고 “남편의 꼼꼼함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원정갔다가 돌아와 새벽 2시에도 깨워 통장정리에 가계부까지 챙긴다”고 끼어들었다)

-부인과 애정이 각별하다는데.

(쉐릴)“우리는 85년 고향의 한 슈퍼마켓에서 직원으로 서로 만났고,남편이 한국땅을 밟던 98년 결혼했다.신혼살림은 한국에서 시작했다.남편의 얼굴은 우락부락하지만 실제로는 무척 센티멘탈한 면이 많다.지난 9월22일 내 생일날 잠실 홈경기때 본부석에 앉아 있었는데 5회말이 끝나고 구장정리 시간때 전광판에 ‘사랑해,쉐릴.생일 축하해”라는 메시지를 띄우기도 했을 정도다.”

-메이저리거로서의 꿈은 남아 있나.은퇴후 계획은.

“모르겠다.빅리거가 된다해도 한시즌에 홈런 30개를 때리고 싶다.홈런은 신이 주신 능력이다.항상 감사한다.은퇴후에는 야구캠프나 맥도날드 등 패스트푸드 식당을 운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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