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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女 부축했는데 엘리베이터CCTV서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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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논설위원

지난주 화요일 밤 서울 종로의 한 포장마차에서 일어난 일이다. 62세 일본인 남성이 옆자리에 앉은 30대 여성의 둔부 쪽 허벅지에 손을 댔다가 성추행 시비가 붙었다. 일본인은 여성 일행이 항의하자 당황한 듯 지갑에서 엔화 지폐를 꺼냈다.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그런데 조사를 벌인 경찰은 이 사건을 불기소(혐의 없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기로 했다. 종로경찰서 강상문 형사과장과 전화 통화를 했다.

 -몸에 손을 댔는데 왜 추행이 아니라는 건가.

 “손바닥이 아니라 손등을 4~5초 댄 정도다. 일본인은 ‘일행으로 착각했다’고 한다. 여성은 겨울옷을 입어 손등 닿은 사실도 감지하지 못했다. 일행이 알려준 것이다.”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처벌해야 하지 않나.

 “명백히 추행이 아니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추행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잘못된 행동을 했다고 무조건 처벌할 수 없는 것 아니냐.”

 해당 여성은 “죄가 되는지 여부는 경찰 판단에 맡기겠지만 (일본인이) 경각심을 갖게 해달라”는 뜻을 밝혀왔다고 강 과장은 말했다. 문제의 일본인은 선량한 여성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반대 케이스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법을 가르치는 여성 교수 R은 “지난 몇 년간 내 수업을 들은 학생들 가운데 ‘거리의 꽃뱀’에게 당한 경우가 10건이 넘는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하철에 가만히 서 있는데 옆에 있던 여성이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어딜 만져요!” 그런 적 없다고 극구 부인해도 자신이 했음을 증명하기보다 하지 않았음을 입증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합의금 200만원을 주고 사건은 종결된다. 모르는 여성과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곤욕을 치른 사례도 있다. 여성이 술에 취한 것처럼 자기 쪽으로 쓰러져 부축해줬을 뿐이다. 엘리베이터 CCTV엔 추행한 것으로 나온다. 합의금 500만원. R 교수는 “한번은 학생을 도와주러 갔다가 피해자라는 여성이 ‘오늘 등록금 벌었어’라고 전화하는 걸 들은 적도 있다”고 했다.

 “일단 성추행범으로 낙인찍히면 사회적으로 매장되잖아요. 무섭죠. 그 상황에서 고소를 취소하면 아예 없던 사건이 돼버리는 친고죄 규정을 악용해 돈을 받아내는 겁니다. 앞으로 친고죄가 없어진다 해도 구속, 형량을 빌미로 그런 일들이 계속될 거라고 봐요.”

 잠깐, 오해 말기 바란다. 추행을 일삼는 인간 말종들을 옹호하려는 게 아니다. 성범죄에 관한 논점을 흩트리려는 것도 아니다. 지하철 성범죄가 한 해에 1291건(2011년)씩 일어나는 나라다. 블루스를 빙자해 여성에게 접촉을 강요하거나 손과 입을 잘못 놀리는 ‘늑대’들은 아직도 많다. 그렇다고 추행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상황에 눈을 감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문제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데 있다. “공중(公衆)이 밀집하는 장소에서 사람을 추행한 사람”(성폭력 처벌 특례법 제11조)이란 추상적 법 규정과 ‘성적 수치심’ 같은 잣대만 갖고는 추행 여부가 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오가게 된다. 지능적 추행범은 뜰채를 빠져나가고 순진한 남성이 걸려들기 쉽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고들 하지만 엉성한 법은 주먹이 돼 날아온다.

 여성의 성을 보호해야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범죄는 엄단해야 한다. 그러나 각론 없이 총론만 나부끼는 사회에선 공포심을 먹고 사는 사업자들이 판을 친다. 범위를 넓히면 기업에서 푼돈 뜯어내는 사이비 언론, 공직자에게 술 몇 번 사주고 평생 노예로 삼으려는 브로커도 ‘공포 사업자’들이다. 욕망의 정글에서 살아남으려면 개개인이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겠지만, 내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매도하고 비난하려 해선 안 된다. 언뜻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자세한 속사정도 알아보지 않은 채.

 이제 곧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가 법치를 강조하고 있다. 법망을 더 튼튼히 조임으로써 범법자는 끝까지 단죄하되 공포의 희생자는 막는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아무리 소수의 일이라고 해도 당사자에겐 인생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