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할린 동포들의 한 많은 삶, 잊혀져가는 역사 되살리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4면

천안에 정착한 사할린 동포들이 자신들의 한 많은 삶을 기록한 수기집 『디아스 포라 천안』을 발간했다. 오른쪽 첫 번째는 안창옥 편집위원장.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아버지가 늘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 속에는 한이 서렸다. 가슴 속에 그리움이 응어리진 고향을 그리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철없던 나는 ‘또 술 잡수셨네’ 하며 ‘이젠 그만 부르지’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철없던 봉순이가 벌써 70살이다.”

 사할린 영주 귀국자 박봉순(70)씨의 수기에는 충북의 고향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사할린에서의 어렵고 고생스럽던 삶의 기억은 한 살배기 동생을 업고 엿 장사를 나섰다가 집에 돌아오실 때 죽은 동생을 업고 돌아온 어머니의 이야기로 더욱 절절해졌다.

 유하녀(66)씨는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탄광에서 일을 했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너무 힘들어 몇 번이나 도망을 쳤지만 매번 붙잡혀 매를 맞고 다시 탄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한국으로 돌아가실 날을 꼽으며 ‘비공민증’을 고이 간직하다가 돌아가셨다.

 사할린 동포의 삶과 희망의 기록 『디아스포라 천안』이 천안시의 지원을 받아 발간됐다. 10일 천안 박물관 대강당에서는 청룡동 관내 버들마을에 영주 귀국해 살고 있는 사할린 동포들과 초청 인사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천안시 청룡동주민자치센터와 국제로타리 클럽의 주최로 열린 이날 행사는 안창옥 사할린동포 수기집 편집위원장의 경과보고를 시작으로 서장근 천안동남구청장의 격려사, 최민기 천안시의회 의장의 축사, 신창태 사할린 동포회장의 감사패 전달, 동영상 상영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이산(離散)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로 본래 세계 각지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의미하는 말이다. 현재 천안시 동남구 청룡동 버들마을에 살고 있는 사할린 영주 귀국자는 모두 53세대 87명이다. 『디아스포라 천안』에는 이들 중 7명이 쓴 수기 외에도 디아스포라 역사, 사할린 리포트 등 사할린 재외동포들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신창태(67) 버들마을 사할린 동포회장은 “우리 동포들에게 정말로 큰 의미가 있고 소중한 책”이라며 “한국에 와 3년 동안 살면서 정말 많은 관심과 사랑으로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책을 발간하기까지 애써 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밝혔다.

 『디아스포라 천안』이 나오기까지는 사할린 수기 편집위원회의 노력이 가장 컸다. 편집위원회원들이 지난 8월 사할린의 코르사코프항구 망향의 언덕을 방문했을 때다.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군이 진주했을 때 동포들은 코르사코프항구에 모여들어 귀국선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으나 끝내 그들을 태울 배는 오지 않았기에 미쳐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는 비문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하고 숙연해졌다고 한다.

특별히 신태우 할아버지의 ‘오천년의 역사’ 기록을 찾게 된 것은 큰 보람이었다. 후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손을 호호 불며 3년여에 걸쳐 일일이 써내려 간 귀중한 자료였다. 안 편집위원장(해솔문화다큐재단 대표)은 “연로하신 사할린 동포들의 한 많은 삶의 기록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며 “한국말이 서투른 어르신들의 수기를 모으고 인터뷰하는 과정이 쉬운일은 아니었다. 이 책의 발간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이해하고 잊혀져가는 역사를 되새기는 작은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디아스포라 천안』 편집위원회는 사할린 주민을 돕기 위해 사사모(사할린을 사랑하는 모임)를 결성해 사할린 동포들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을 할 계획이다. 안 편집위원장은 “2013년에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도전할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글·사진=홍정선 객원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