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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사락의 태두 순암 안정복-유홍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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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제천의 이름난 집안>
안정복은 실학의 대가이던 남인 성호 이익의 문하생으로서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광주에 숨어서 널리 학문을 닦고 동사강목이라는 국사교본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지어내며 영조의 무름을 받아 그 세손이던 정조의 스승까지 지낸 사학의 태두였다. 그는 광주에 본관을 둔 울산 부사(울산) 안서우의 손자이며 광평군 안극의 맏아들로서 1712년12월에 충청도 제천에서 낳아 자를 백순, 호를 순암 또는 한산병은, 우이자, 상헌 등이라 일컬었다. 그의 7대조 할머니는 이조 14대왕 선조의 누님이었다.
이렇듯 이름난 집안에 태어난「순암」은 천성이 또한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글을 잘 배우고 성격이 온순하고 깨끗하며 언동이 단아하여 도사의 기풍이 있었다.

<당쟁에 벼슬 안 바라>
남인에 속한 그는 노론·소론의 당파싸움이 가장 격심하여 뭇 선비들이 목숨을 잃음을 보고 뜻을 벼슬자리를 얻고자 하지 않았다. 젊을 때부터『선비는 일 예로써 이름을 얻을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널리 모든 경서사적을 읽고 백가의 서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밝히지 않음이 없었다. 이러한 무렵에 그는 이익이 광주 땅에서 퇴계학을 가르치고 있다함을 듣고 그곳의 덕곡으로 옮아가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이익의 간절한 인도>
이익은 한번 그를 보고 큰그릇임을 알고 곧 옛 성현의 학과 도를 닦으라고 친절히 말하였다. 이 때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모두 그곳에 모이고 있었는데 그는 특히 윤동규 이경협과 뜻을 같이 하고 도를 닦으며 밤낮으로 학을 강론하고 거듭 난점을 풀어 같은 귀결을 얻었다.

<참봉의 벼슬을 받아>
이리하여「순암」의 이름이 사방에 퍼지게되니 학자를 사랑하던 영조는 1749년에 그에게 풍덕(개풍)에 있는 2대왕 정종의 후릉을 지키는 참봉(참봉·종구품)의 벼슬을 주었다. 그러나 그가 이 벼슬을 받아주지 않음을 보고 영조는 다시 그에게 그 스스로의 초상화를 모신 만령전을 지키는 참봉자리를 주었다.

<40대 때는 봉사벼슬>
이에 그는 할 수 없이 이 벼슬을 받고 감사의 뜻을 올리며 이어 2년 후 40세 때에는 궁중에서 쓰는 꿀·밀초·기름·후추·채소 등의 곡물출납사무를 맡아보는 의영고 봉사(종팔품)가 되었다. 이때 그는 청렴결백한 태도로 공인들을 다루었으므로 공인들이 그의 송덕비를 그 관청문 앞에 세웠는데 이러한 일은 서울의 관청에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어「순암」은 광주에 있는 3대왕 대종의 헌릉을 지키는 직장(종칠품)과 민간 장례물을 맡아보는 귀후서별제(종육품)를 거쳐 관기를 다스리는 사헌부감찰(종오품)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1754년 43세 때에 부상을 만나게 되매 벼슬을 내놓고 집으로 돌아가 이후 20년 동안 숨어서 학문을 닦고 저술에 힘썼다.

<세손 가르치는 신하>
이러는 사이에 영조는 다시 그에게 비단·모시·마포·피물·인삼 등의 진상물을 맡아보는 제용감주부(종육품)와 양반죄를 다스리는 의금부도사(종오품)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고 1772년 61세 때에는 왕세자를 돌봐주는 익위사익위(익위·정오품)가 되었다. 때마침 재주가 뛰어나고 글을 잘하던 정조가 세손이 되었는데 그를 가르칠만한 신하가 없었으므로 세자 시강원의 빈객(정이품)이던. 채제공의 진언에 따라 그를 고문으로 삼게되었다. 이로부터 그는 세손의 사연(글 배우는 자리)에 나아가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하여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므로 세손도 그를 다른 신하보다 다르게 대접하여 그를 익위사익찬(익찬)으로 삼았다가 1776년에는 충청도 목천(천안) 현감을 시켰는데 그는 이곳에서 풍속을 바로잡고 숙폐를 고쳐 크게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러한 때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목천현감의 3년 임기가 끝나게 되니「순암」은 또 벼슬을 내놓고 광주로 돌아갔다가 1781년 70세 때에는 왕족 관계의 일을 맡아보는 돈령부주부를 거쳐 헌능령이 되었다.
이때 그는 그가 지은 동사강목 20책을 왕명에 따라 정조에게 바쳐 규장각 학사들로 하여금 교증케 하였다. 이어 정조는 1784년에 그를 세자의 익찬으로 삼았으나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가하였다.

<동사강목을 교증케>
그러나 그는 벼슬자리에 나온 후 40년이 되던 1789년에는 포정대부(정삼품)와 관계와 중추부 첨지의 벼슬을 받고 다음해에는 중추부 동지사직(종이품)과 광성군의 작위를 받고 그 다음해(1781년) 7월23일에 80세의 나이로 죽게되었다. 이리하여「순암」은 오랜 생애 동안에 뜻하지 않은 벼슬자리를 몇 차례나 살게 되었으나 그의 본뜻은 어디까지나 글을 닦고 조국의 역사, 지리, 정치와 경학, 예의, 서양학에 관한 책을 지음으로써 실학을 대성하는데 있었다.

<국민을 위한 국사>
그의 저서로는 역사에 관한 동사강목·열조통기·사감과 지리에 관한 광주지·목천지와 정치에 관한 희현록·홍범연의 임관정요와 경학에 관한 어류절요·잡괘록·소학강의·하학지남과 예의에 관한 가례주해·관혼작의, 천주교에 관한 천학고·천학문답과 시문집이 있었다. 이 많은 책들 중에서 그의 실학사상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동사강목과 천학고·천학문답이다. 동사강목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을 본떠서 고조선이래 고려말까지에 이르는 우리역사를 한문으로 읽기 쉽게 적은 책으로 지도와 관직도 등이 들어있는 국민을 위한 일종의 국사교본이다.

<미인이 영문번역>
이 책은 이조말기에 한성외국어학교 초빙교사로 와 있던 미국인「헐버튼」(H. Hulbert)에 의하여 영문으로 번역되어 1905년에 발행된「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2책의 1책을 이룰 정도로 우리 사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게되었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은「순암」이 그의 사위이던 권일신을 비롯한 남인선비들이 .천주교를 믿는 운동을 일으킴을 보고 그것이 장차 반대당에게 당화를 일으키게 하는 구실로 될 것을 걱정한 끝에 그 스스로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여러 가지의 천주교 책을 두루 읽고 그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고자 지은 책들이었다.

<많이 읽힌 천주교 책>
그가 읽은 천주교 책은 천주실의 2권, 기인편 2권 칠극 7권, 진도자휘 4권, 변학유독 1권이었는데 특히 1757년 46세 때에는 변학유독을 읽고 그 스승이던 이익에게『스승께서도 이 책을 읽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하니 그는 천주교를 상당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타이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인이던 정약전 형제 권철신 형제 이가환, 이승훈들은 천주교를 솔선하여 믿음으로써 마침내 조국의 근대화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유홍렬 문박·서울대문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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