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조주청 만화가·여행작가

중앙일보

입력

"『밀림의 왕자』 13권 나왔어요?"

빈 도시락과 함께 싼 책보자기를 허리에 동여매고 달그락 소리를 꼬리에 달며 만화가게 문을 열고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아직"이라는 주인의 대답이 나오기 전까지는 가슴 터지는 희망이었다.

일본 번역판(얼마 전에야 알았던 일이지만) 『밀림의 왕자』는 어린 나를 아프리카 정글 속에 던져 넣었다.

이 만화책은 훗날, 내가 만화를 그려 밥을 먹고 그리고 1백나라 넘게 지구촌을 쏘다닌 역마살의 단초가 된 것이라 나는 굳게 믿는다.

중학교 때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으며 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잠자리에 누워 칠흑같은 천창을 바라보면 책 속의 그 모험에 찬 모습들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그림 한 컷 없는 책에서 활자들이 뛰쳐나와 춤을 추며 내 머리 속에서 생생하게 영상화하는 것이다. 그 후에 영국 배우 데이비드 니번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그 영화의 화면은 활자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영상에 비하면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이후로 책을 읽고 동명의 영화는 절대로 보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고난 후 눈을 감고 활자를 영상으로 바꾸는 작업을 한다.

몇 년 전, 우연히 책방에서 『마젤란』(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자작나무) 이란 책을 펼쳐보다가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그의 발자취를 따라 이어진 지도 위의 줄금에 내 발자국도 찍힌 것을 알아차렸다.

저녁 수저를 놓고 책을 펼치자 그 유려한 문장 속으로 금방 빨려 들어가 눈을 감지 않아도 마젤란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선혈로 물든 칼이 보이고 드레이크 해협의 노도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역사를 바꾼 마젤란 해협을 빠져나와 태평양을 건널 때 목이 말라 울부짖는 선원들을 읽다가 나도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고 벌컥벌컥 물을 마시며 마젤란이 필리핀 시부해안에서 죽고 책장을 덮을 땐 새벽 네시가 되었다.

"활자가 영상에 밀린다"는 말에 나는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