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선 나몰라라 … 정권 말 손놓은 감독 행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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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 서울의 한 대형마트 계산대 앞에 비씨카드·KB국민카드 등의 무이자 할부 서비스 종료를 알리는 문구가 게시돼 있다. [강정현 기자]

‘연 1조2000억원’.

 올 들어 신용카드사와 대형할인점·통신사·항공사 등 대형 가맹점이 다투고 있는 무이자 할부 서비스 비용(금융위원회 추산)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 비용의 상당수를 신용카드사가 부담했다. 하지만 카드사는 지난해 12월 시행된 개정 여신전문금융업법을 들어 가맹점에 할부 서비스 비용을 5대 5로 분담하자고 요구했다. 1조2000억원을 똑같이 6000억원씩 나누자는 것이다. 개정 여전법은 ‘대형 가맹점은 판촉행사 비용의 50%를 초과하는 비용 부담을 (카드사에)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통업체를 중심으로 한 대형가맹점은 이 규정이 똑같이 분담하라는 의미는 아니며, 비용 부담이 너무 커져 카드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반발했다. 무이자 할부 결제 서비스 신청이 가장 많은 대형마트는 이 서비스를 계속하게 되면 연간 500억원 정도의 이자비용을 부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최근 골목상권 보호를 위해 신용카드 수수료율을 올린 상황이라 추가 비용을 떠안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양측 입장이 팽팽히 맞서며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대형할인점·통신사·항공사 등에선 올해부터 무이자 할부 서비스가 전격 중단됐다. 무이자 할부가 중단될 경우 그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6일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카드사가 대형 할인점과 통신사·항공사에 제공한 무이자 할부 이용금액은 2011년 기준으로 68조원에 달한다. 2009년 46조5000억원에서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현장에서는 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무이자 할부 3개월로 해주세요.”(고객)

 “고객님. 카드는 이제 무이자 할부가 안 됩니다.”(직원)

 6일 롯데마트 서울 중계점에서 장을 본 주부 정순임(48)씨는 무이자 할부로 신용카드 결제를 하려다 얼굴만 붉혔다. 정씨는 “(무이자 할부 중단을) 전혀 몰랐다”며 “돈 없는 서민이 할부를 쓰는데 서민만 자꾸 죽어라 하는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서비스는 새해 첫날부터 중단됐지만 소비자에게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연초부터 대형마트·백화점을 비롯해 항공사 티켓 창구, 온라인 몰, 가전매장 등에서 고객과 매장 직원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다.

 대형마트 관계자는 “무이자 할부는 카드사가 신규 가입자를 유치할 목적으로 벌였던 이벤트”라며 “카드사의 고객 유치 비용을 왜 대형마트가 부담해야 하느냐”고 반발했다. 반면에 카드사는 법대로 하자는 입장이다. 카드업계 관계자는 “대형 유통회사 등이 이를 거부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비자에 대한 혜택을 중지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적지 않은 유통사가 수수료 50%를 부담하고 있는데 대형마트만 이를 거부하는 것은 일종의 횡포”라고 덧붙였다.

 이번 사태는 정권 말 ‘법만 있고 행정은 없는’ 전형적인 금융감독 공백이 원인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사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여전법 개정은 신용카드업계 간 과당경쟁을 막고, 수수료를 정상화해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금융당국은 법만 개정해 놓고 그 뒷감당이나 불편은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금융위 관계자는 “잘못된 시장질서를 바로잡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만큼 당분간은 사태 추이를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조연행 한국금융소비자연맹 대표는 “목돈 결제가 힘든 서민들이 할부결제를 이용하는 점을 감안하면 무이자 할부 분담금을 둘러싼 카드사와 가맹점 간 힘겨루기에 애꿎은 서민만 피해를 보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무이자 할부 혜택이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다. 카드사별로 전 업종에 걸쳐 2~3개월 무이자 할부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드가 있다. 특정 할인점·백화점과 제휴를 맺은 카드의 무이자 할부 서비스도 그대로다.

 손해용·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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