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생각하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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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호 30면

지금부터 15년 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당선인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정운영의 기본으로 삼겠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분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게 없었지만, 시장경제를 강조하는 것은 의아하게 생각됐다. 민주화 투쟁 시절 재벌보다는 중소기업 육성을 강조하고, 부자보다는 서민·중산층 편에 서겠다는 이미지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자신에게 이념적 색깔이 덧씌워질 것을 염려해 한 말이었다고 생각됐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가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재벌과 금융기관들이 관치금융의 고리로 연결돼 시장경제 원리를 왜곡해왔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금융·재벌개혁을 동시에 추진해 부실 금융기관을 과감히 정리하고, 30대 재벌의 절반 이상이 주인 교체를 하는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재벌개혁은 새 대통령이 중소기업을 중시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경제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확고한 원칙하에 추진된 것이었다.
재벌보다는 중소기업 대통령, 부자보다는 중산층을 복원하는 민생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한 박근혜 당선인에게 우리 경제는 3%미만의 저성장 위기와 청년실업, 소상공인 경영위기라는 시련이 닥쳐오고 있다. 국민은 국제통화기기금(IMF) 외환위기 때보다 더 어려운 시기가 닥쳐오는 것 아닌가 불안해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보다 ‘무슨 원칙하에 어떻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국민 불안을 줄이는 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통령이 아무리 강조해 말해도 시장경제 원리에 맞지 않는 것은 실현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재벌에 정리해고를 자제하고 청년 일자리를 늘려달라고 요청해도 기업의 생존을 위협할 만큼 심각한 불황에 직면하게 되면 대통령 말을 따를 수 없는 것이다. 왜 재벌이 정규직 채용을 꺼려했는지, 왜 외국에서만 투자를 늘리려했는지 그 원인을 찾아내 법과 제도를 고쳐주는 게 시장경제 원리에 따르는 것이고, 법치주의에 부합하는 일이다. 골목상권 보호 약속도 대형마트를 규제한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 입장에서 부족한 요소를 보완할 수 있도록 지원 방법을 찾아야 한다. 재벌오너들에게 아무리 중소기업과의 상생발전을 주문하더라도 계열기업 사장들의 목숨이 이익 발생 규모에 달려있다면 납품단가 후려치기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재벌 오너들의 고용사장 평가기준이 달라지고 외부적 중재기능이 있어야 해결될 문제다.

산업현장에 도움되는 교육·기술을 배우지 못하고 대학을 나오는 청년들에게 정부가 일자리를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인재를 길러내는 교육개혁과 직업훈련시스템을 정부가 마련해줘야 청년실업이 완화될 수 있다. 이런 일에는 재벌 기업들도 얼마든지 동참·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가 18조원 행복기금을 만들어 하우스 푸어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근본적 해법이 아니라 곁가지치기에 불과하다. 요약해보면 민생경제를 살리는 일은 표면에 나타난 상처를 정부 권위에 의존한 대증요법이 아니라 내면 구조를 시장경제 원리에 맞게 원인 치료하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복지도 마찬가지다. 국채 발행처럼 나랏빚을 늘려 복지를 확대하기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기존 예산을 잘라내는 고통과 국민 세금 부담을 늘리는 진통을 겪으면서 확대한 복지가 지속 가능한 복지이고 리더십 있는 지도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새 정부는 출범 즉시 재정개혁을 단행해 정부예산 개혁과 조세개혁을 추진하기 바란다. 요즘 시장경제 원리를 강조하면 보수적이라고 비난받기 쉽다. 4년 전 미국발 금융위기를 시장만능주의 시대의 종언이라고 비판해 온 진보주의자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양립하기 어려운 가치라고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다. 그러나 시장경제는 그 결함을 고쳐가면서 진화·발전시켜야 할 글로벌 시스템이기 때문에 정치적 개입 또는 권력 행사를 통해 시장 기능을 대체하려고 하면 할수록 나라경제는 법치에서 벗어나 망가질 뿐이고 국제경쟁력은 약화될 것이다.

1인1표주의에 바탕을 둔 민주정치는 시장경제의 경쟁규칙을 공정하게 만들어 관리하면서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역할을 책임진다. 요즘 거론되는 경제민주화는 양극화라는 결과의 불균형 현상을 개선하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 역할도 가급적 법과 제도에 의해 수행되는 법치가 근본이 돼야지 공권력에 의한 자의적 정부 개입에 의존해서는 실효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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