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되는 노년기 두 모델, 태종과 리어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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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호 20면

노년은 청·장년 시절과 달리 특이한 기간이다. 근로소득보다 모아놓은 자산에서 나온 돈으로 대부분 살아간다. 젊을 때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여러 일을 시도해보라고 하지만 노년의 실패는 치명적일 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중대한 선택에 직면한다. 태종과 리어왕이라는 두 인물의 일화를 통해 노년 삶의 모델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시대 3대 임금인 태종은 한창 나이인 52세에 22세인 세종에게 왕위를 전격양위하고 상왕으로 나앉는다. 장자인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3남 세종을 세자로 앉혔기에 그 기간이 극히 짧았는데도 불구하고 양위를 단행한 것이다. 다만 세종이서른 살 될 때까지 군사·국방과 관련된 일은 손수 챙기겠노라고 신하들에게 공언한다. 그런데 태종이 만난을 뚫고 왕위에 오르는 데 공신 노릇을 한 병조참판 강상인이 태종을 제쳐놓고 세종에게 직보하곤 했다. 태종은 강 참판을 삭탈관직하고 관노(官奴)로 삼는 극단적 처벌을 가한다. 세종에게 양위한 지 불과 보름 만의 일이다. 두 달 뒤에 태종은 다시 강상인 사건을 들춰내 그의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했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마저 사약을 받게 된다.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는 간단찮은 사건이긴 하지만 태종은 상왕으로서의 무소불위 권한을 만천하에 보여준 것이다. 이후 태종은 골치 아픈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서도 권한을 누리고, 한편으론 사냥과 외유를 즐기다가 56세에 세상을 떴다.

증시고수에게 듣는다

노년 가치, ‘옵션’ 원리로 설명 가능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하나인 리어왕. 주인공 리어왕은 팔순이 다 돼 세 딸에게 가진 것을 물려주려고 했다. 가장 효성스러운 딸에게 자신의 왕국을 물려주고 그냥 자식들 집을 번갈아 머무르며 살겠다고 한다. 앞에서 아첨하는 첫째와 둘째 딸이 왕국을 물려받고 효심 지극한 셋째 딸 코델리아는 한푼도 받지 못하고 쫓겨난다. 리어왕은 시종 100명만 남기고 모두 물려줬지만 첫째 딸 집에 이마저 빼앗겨버리고 쫓겨난다. 둘째 딸 집에서도 쫓겨나 폭풍 속에서 방황한다.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 ‘폭풍 속의 리어왕’이라는 회화 작품이다. 18세기 영국의 대표적 초상화가인 조슈아 레이놀즈가 그렸다. 셋째 딸이 이를 되돌려보려고 하지만 결국 모두 죽게 되는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리어왕의 비극은 모질고 부적절한 2세들에게 재산을 몽땅 물려준 데서 비롯됐다. 이에 비해 태종은 어진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에 관한 권한은 놓지 않았다. 태종은 세종이 서른살 될 때 군사 권한까지 넘겨주겠다고 했으니까 8년은 더 가지고 있겠다는 뜻이었다.
노년의 가치는 무엇이 지배할까. 리어왕과 태종의 의사결정은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가. 노년을 맞은 이들은 무엇으로 주변의 존중을 받을 수 있을까. 팻 테인의 노년의 역사를 보면 젊을 때와 달리 노년은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받는 대접이 극에서 극이다. 노년에도 주변에 대한 권위와 지배력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랑자나 장애인 취급을 받기도 한다. 날로 물질적 풍요가 보편화함에 따라 이러한 극단적 차별은 줄게 됐다. 하지만 노년에 적절한 수준의 소득이나 자산이 있어야 권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이는 시간의 가치라는 잠재성을 가지고 있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다. 옵션(option) 가격이라는 시각에서 이러한 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 옵션의 가치는 시간가치와 본질가치의 합으로 결정된다.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므로 그 가치를 더 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옵션은 만기가 되어가면, 즉 시간이 별로 남지 않으면 시간가치가 줄어들어 옵션 가격이 해당 기초자산의 본질가치와 같아진다. 반면에 만기가 남았을 때는 본질가치에 시간가치가 추가된다.
젊을 때는 시간가치가 무궁무진하다. 한 청소년이 장차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될지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에서 뛰노는 애를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돈이 많든 적든 간에 젊은이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처럼 창창한 시간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노년이 될수록 시간가치는 점점 사라지고 현금·부동산이라든지 사회적 인맥, 기술·노하우나 명성 등 본질가치만 남게 된다. 시간가치가 거의 없는 노년기에 본질가치마저도 없다면 노년의 가치를 어떻게 인정받겠는가. 그래서 노년에 들면 이미 갖고있는 것에 의해 평가를 받는 것이다. 리어왕처럼 가진 것을 싹 주고 나면 자신의 가치도 사라져버린다.

자식에 다 걸면 노년 가치 훼손
리어왕은 노년에 남은 본질가치를 모두 물려주었고, 태종은 이를 다 물려주지 않고 일부 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의 길은 극과 극으로 갈렸다. 한 나라의 왕이 이러할진대 일반인은 오죽하겠는가. 물질적정신적으로 쪼들리는 노후를 맞지 않으려면 이를 명심해야 한다.
미국과 독일은 노후에 자식에게 의존하는 비율이 각각 0.7%, 0.4%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연금 의존도가 70~80%에 이른다. 우리와 같은 동양권인 일본도 자식 의존 비율이 1.9%에 불과하고 연금 의존도가 68%에 달한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자식 의존 비율이 무려 30%나 되고 연금 의존율은 13%에 불과하다. 아마 이 비율은 급격히 변할 것이다. 자식 의존 비율은 급락하고 축적한 자산과 연금에 의존하는 비율은 급등할 것이다.
그러니 노년의 본질가치를 훼손할 만한 일은 하지 말자. 자녀 교육이나 혼인에 돈을 펑펑 쓰는 건 노년에 필요한 자산을 대책 없이 잠식하는 요소다. 미래에셋 퇴직연구소 설문조사를 보면 노후 준비 부족의 가장 큰 원인으로 ‘자녀에 대한 과다한 투자’를 꼽는다. 혼수비용도 만만찮다. 우리나라 40~60대 연령 중 은퇴 빈곤층이 10가구 중 4~5가구에 달한다. 결혼비용까지 온전하게 댈 경우 이것이 6~7가구에 이를 것 이라는 추산이다.
유산은 이제 불확실한 노후 준비에 충당하고 남은 자산, 즉 ‘잔여’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턱대고 자녀에게 베풀고 ‘여생은 어찌 꾸려나가겠지’ 하고 막연히 기대하는 것은 위험하다. 장수가 재앙으로 간주되는 시대다. 자녀는 이제 더이상 은퇴계층을 부양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은퇴나 퇴직 시장은 이제 과거와는 판이한 양상을 예고한다. 리어왕이 아니라 태종의 모델을 따라야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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