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안철수, 사퇴 전날 만난 사람 누구인가보니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람의 얼굴 표정은 처한 상황에 따라 바뀐다. 안철수 전 후보도 그렇다. 왼쪽부터 지난해 9월 19일 출마 선언을 하던 당시 상기된 표정. 11월 23일 후보 사퇴를 발표하던 순간. 그리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적극 지지하겠다고 선언한 뒤인 12월 9일 경기도 군포 유세 현장에서의 모습.

리더는 항상 외로운 결단을 해야 한다. 조직의 운명을 좌우하는 크고 작은 결단을 거의 매일 하고 산다. 이런 리더들은 어떤 인식과 철학으로 최종 결론을 내릴까. 누구의 조언을 듣고 결단할까. 우리는 사소한 결심조차 못하고 우왕좌왕할 때가 많다.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의 리더들은 결단을 내릴 때 어떻게 할까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있다. 조직의 흥망성쇠를 가른 큰 결단을 내렸던 리더들을 심층 탐구해 ‘결단의 순간들’이라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안철수(51) 전 대선 후보가 지난해 11월 23일 ‘후보 사퇴 결단’을 내리기 전 마지막 숙고는 약 45분이 걸린 것으로 추산된다. 이날 오후 6시15분쯤 안 캠프의 박선숙 선대본부장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이인영 공동선대위원장이 ‘안ㆍ문 특사’로 벌인 막판 단일화 협상은 끝내 결렬됐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안 전 후보는 선거캠프가 마련된 서울 공평동 공평빌딩 내 6층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조용경(62) 국민소통자문단장은 저녁 식사하러 공평동 캠프를 나와 측근들과 인근 식당으로 갔다. 안 전 후보가 곧 사퇴 결심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캠프 내 측근들조차 눈치 채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조 단장은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 7시쯤 “긴급 회의가 있으니 빨리 들어오라”는 비서실 직원의 화급한 전화를 받았다. 공식적인 사퇴 기자회견은 8시20분에 열렸다. 결국 안 전 후보가 최후로 고민한 것은 이날 오후 6시15분~7시사이의 약 45분간으로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그는 오후 3시30분쯤 자신의 범죄경력증명서를 떼기 위해 종로경찰서로 갔다. 후보직 사퇴를 이미 결심했다면 이런 행동은 필요가 없었다. 민주당을 압박하기 위한 최후의 벼랑끝 전술이 아니었느냐는 얘기도 나온다. 금태섭 상황실장은 “그때만 해도 양쪽 특사들이 최종 협상 중이었고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라 후보 등록을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그의 행보는 단순한 해프닝이었다는 진술도 있다. 한형민 공보실장은 “나중에 알고 보니 대선 예비후보 등록 때 범죄경력증명서를 이미 내후보 등록을 할 때는 다시 낼 필요가 없었다. 행정 담당 실무자가 ‘필요하다’고 잘못 보고해 떼러 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안 전 후보는 9월 19일 출마선언을 하고 같은 달 24일 대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안 전 후보 행동이 민주당을 압박하기 위한 벼랑끝 전술이었건, 아니면 해프닝이었건 관계없이 이때까지 그는 사퇴 결단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안 전 후보는 하루 전날 조 단장이 이끄는 국민소통자문단과 간담회를 하면서 ‘독자 출마론’에 무게를 두는 말까지 했다. 이날은 안철수 후보가 문 후보와 양자 회동을 한 뒤였다. 당시 참석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사퇴 전날 법륜 스님과 박경철씨도 만나
캠프 내에서는 안 후보가 문 후보에게 실망했다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문 후보가 일방적으로 안 후보를 질책하고 판을 깨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다그쳤다는 후문이다. 안 전 후보는 자기 얘기는 듣지도 않고 양보만을 강요한 문 후보에게 배신감까지 느꼈다고 한다. 안 전 후보도 “문 후보와는 같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조 단장은 “굳이 단일화하지 않아도 승산이 있고 지더라도 차후에 정치인의 길을 더 비중 있게 갈 수 있다. 문 후보나 민주당에 엮이면 차후 정치 생명도 보장받지 못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새 정치를 위해서는 단일화를 포기하고 독자출마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안 후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런데 안 전 후보는 ‘민주당파’라고 지목된 박선숙 선대본부장 팀을 만나서는 그들의 말에 수긍하는 듯한 언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통합당 출신인 박 본부장팀은 정권 교체는 국민의 엄중한 요구이기 때문에 지더라도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안 전 후보가 조 단장을 만났을 때는 독자출마에, 박 본부장을 만났을 때는 단일화에 무게를 두는 발언을 하다 보니 그에게 조언한 양측은 각각 자신들의 의견대로 그가 결정할 것으로 기대했다.

조 단장도 “그날 긴급회의를 위해 인근 식당에서 공평동 사무실로 갈 때까지 그가 사퇴를 결심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내 조언대로 문 후보와 결별 선언을 할 것을 은근히 예측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 전 후보는 ‘후보직 사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정을 했다. 박 본부장 측이 주장한 ‘끝까지 단일화론’도 아니고, 조단장 측이 설득한 ‘독자 출마론’도 아니었다. 그는 제3의 길을 선택했다. 박 본부장 측이나 조 단장 측 양쪽 모두 ‘멘붕(멘털 붕괴)’에 빠졌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일부 측근은 한 시간 뒤 TV로 생중계된 안 후보의 사퇴 기자회견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소주잔만 기울였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안 전 후보의 평소 결단 스타일은 어떤 것일까.
우선 ‘자네 말도 맞고 자네 말도 맞다’는 황희 정승처럼 주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한다. 그런 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단을 내리는 스타일이라는 설명이 많다. 그의 정보기술(IT)회사 경영 경력을 반영하듯 컴퓨터의 프로그램을 공들여 짠 뒤 어느 날 ‘엔터키’를 눌러 즉각 실행하는 스타일이라는 평가다. 언뜻 보기에는 우왕좌왕하고 우유부단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반론이다. 안 전 후보가 사퇴 결단을 하기 전 박 본부장 측과 조 단장 측의 의견만 들은 것이 아니다. 전날 자신의 멘토인 법륜 스님과 박경철 의사도 만났다. 사전에 주변의 의견을 충분히 들은 것으로 밝혀졌다. 상황이 급박한데 지인들만 만나고 다니는 안 전 후보를 보고 캠프 안팎에선 ‘우왕좌왕’ ‘우유부단’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금태섭 상황실장은 “사람이 우유부단하다는 것은 한번 결정한 것을 뒤집거나 결정을 잘 못 내리는 것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결정이 늦어지니 언론이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한번 결정하면 그대로 하는 분이다. 과감하고 단호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설립한 안철수연구소(현 안랩) 창립 10주년 기념식 때를 돌아보면 후보직 사퇴의 행보를 조금 이해할 수도 있다.

일부선 “감정기복 심하다는 AB형 스타일”
2005년 3월 18일 그는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전격적인 사임을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측근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던 이유를 그는 간단히 설명했다. “안철수연구소는 상장기업이다.”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안 후보의 예측 불가능한 이런 결단을 어떻게 봐야 할까.

처음 출마를 결심했을 때부터 안 전 후보를 지켜본 캠프의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민주통합당과 문재인 후보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문재인 후보로 단일화되면 박근혜 후보에게 필패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본인이 대통령병에 걸려서가 아니라, 진짜로 정권교체를 하려면 자신으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이 자꾸 네거티브 전략으로 자신을 구석으로 몰고, 문재인 후보가 대선에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더라. 안 후보는 자신이 한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철학이 있다. 또 기존 기득권 정치판을 바꾸려는 새 정치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후보 사퇴의 배경은 과욕을 부리는 민주통합당이나 문재인 후보에 대한 실망감으로 민주당파의 ‘끝까지 단일화론’도, 대국민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독자 출마론’도 모두 접은 것이다. 우왕좌왕도 아니고 우유부단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강직해서 탈이었다. 고집스러운 원칙을 조금만 구겨도 됐을 텐데…. 캠프 내 양쪽에서 다 욕먹는 일을 자초한 것이다.”

안 전 후보의 의사결정에 숨어 있는 키워드가 하나 있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설명이다. ‘욕먹지 마라.’
성격적인 요인과 부모의 가르침일 수도 있다. 그의 멘토인 법륜 스님과 박경철 의사도 평소 그에게 조언할 때마다 ‘욕먹지 마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욕먹지 않으려 몸부림쳤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안철수 브랜드’를 관리해왔다는 게 주변 사람들의 설명이다. 따라서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욕을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컸다고 한다.
자서전인『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에서도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나는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든 없든,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보상이 없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는 같이 없어질 동시대 사람들과 좀 더 의미 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게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브랜드 가치를 지키기 위한 원칙도 스스로 세워 놓고 있다.
“원칙은 매사가 순조롭고 편안할 때는 누구나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원칙을 원칙이게 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 손해를 볼 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일부 동료 의사는 그의 혈액형(AB형) 등을 언급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동료의사는 “안 전 후보는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AB형이어서 그런지 예상치 못하게 바뀌기도 한다. 평소 잘 지내다가도 갑자기 이별을 통보하는 식”이라고 말했다.

조 단장은 안 전 후보가 갑작스레 사퇴를 하자 반발하면서 그에게 애증 섞인 장문의 e-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죄송하다’는 간단한 답신뿐이었다고 한다. 이런 행보와 반응은 프로그램을 치밀하게 짠 뒤 엔터키를 눌러 뒤돌아보지 않고 실행하는 그의 ‘엔터키 결단 스타일’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특별취재팀=김시래·이원호·염태정 기자 윤설아·권은율 인턴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