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끈기로 21년 동네 아저씨 같은 소시민 연기 달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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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호 06면

사진 뉴시스

한 분야에서 21년이나 버텼다면 그건 일종의 능력이다. 그런 능력자 앞에서 1등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별 의미 없는 일일 터. 그 바닥이 ‘정글’로 불리는 연예계라면 한결 그러하다. 지난해 말 드라마 ‘추적자’로 SBS 연기대상을 받은 손현주(48).장동건·소지섭·김명민·이범수 등 쟁쟁한 스타들을 제쳐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고 얼떨떨해 하던 그의 수상 소감에도 오랜 세월 버텨 뚝심을 인정받은 이의 감격이 완연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세상의 수많은 개미들과 이 상의 의미를 같이하고 싶다.” 그의 수상은 시상식을 지켜보던 세상의 수많은 ‘개미’들을 감동시켰다.
과연 개미들의 역전극이었다. 거대 권력집단에 딸을 잃고 아내마저 자살한 소시민 형사의 이야기인 ‘추적자’가 처음부터 방송국 내부에서 환영받은 건 아니었다. ‘아버지’라는 평범한 제목이 붙은 무명 작가 박경수의 1, 2회 대본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예정돼 있던 다른 드라마에 차질이 생기자 방영 한 달 전에 부랴부랴 들어간 ‘대타’였다. “우리 드라마엔 없는 게 너무 많다는 얘기를 수없이 들었다”는 손현주의 토로처럼 시청률을 견인할 연기돌(연기하는 아이돌)도, 톱스타도 없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드라마는 마술처럼 연일 화제를 낳기 시작했다. 시청자들은 그가 맡은 백홍석에게서 자본과 권력의 횡포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읽었다. 딸의 복수를 위해 몸부림치는 소시민 형사의 절절한 눈빛에 그대로 빠져들었다. 재벌과 정치권력, 소시민의 불합리하고도 부조리한 삼각관계는 ‘정의란무엇인가’라는 시대의 화두와, 그리고 대선 정국과 맞물리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당최 속을 알 수 없는 노회한 눈빛의 재벌총수를 연기한 박근형, ‘개천의 용’으로 재벌 사위가 돼 대통령 후보까지 오른 강동윤 역의 김상중, 불륜을 저지르다 교통사고를 내 홍석의 딸을 죽인 동윤의 아내 역 김성령 등 탄탄한 조연 군단도 연륜에 아깝지 않은 몫을 해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손현주는 1991년 KBS 공채 14기로 선발되면서 본격적인 대중 연기를 시작했다. 당시 공채 동기가 한류스타 이병헌이다. 최수종·송채환과 출연한 ‘첫사랑’(1996)의 작곡가 주정남 역으로 얼굴을 널리 알렸고, 이후 ‘옆집 여자’(2003), ‘장밋빛 인생’(2005), ‘솔약국집 아들들’(2009) 등을 통해 소시민 이미지를 굳혔다. 스스로가 “찌질하다”고 표현하는 특유의 수더분함은 손현주를 스타는 아닐지언정 리얼리티 진한 생활연기자로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추적자’는 그의 소시민 스펙트럼을 또 다른 의미에서 한 뼘 확장시킨 작품으로 기억될 법하다. 그의 팬클럽 이름은 ‘뚝배기’. 끓을 때까진 시간이 다소 걸리지만 한 번 끓고 나면 좀처럼 식지 않는 뚝배기처럼 이제 제대로 끓어오른 손현주는 한동안 식지 않을 열정을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에서 이어갈 예정이다. 꽃미남 스타 김수현과 출연하는 액션코미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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