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의식의 자긍부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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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해 신문 주간의 표어는「신문의 긍지」. 신문주간이 설정되면서 올해까지 나오던 신문인의 구호들은「자유」「독립」「책임」「윤리」…등 신문인이 기초적으로 갖추어야 할 여러 사회 조건이나 신문인의 품위에 관한 것이었다. 올해의 구호를 긍지로 정한데는 이런 사회 조건이나 신문인의 내향적인 규율에서 한 걸음 나아가 신문인의 직업 자체에 대해 재평론해야 하고 사명감, 시대 의식을 뚜렷이 하자-는 새로운 방향 정위를 하자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능동적인 자세를>
한국 신문 편집인 협회의 최석채 부회장은 「긍지」를 표어로 삼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어쩐지 신문이 위축되고 있고 책임에 압도당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사명에 대한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스스로「프라이드」를 내세워야 한다. 자숙을 수반한…』 그러면서「신문인의 사명」에 대해 대충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는 선각자적인 역할, 둘째 건전한 사회 질서를 위한 감시, 세째 질서에 대한 도전에 맞붙어 투쟁하는 것.
이런 이유에 대해 신문 연구 소장 오종식씨는 하나의 전제를 설정하였다. 즉『보도의 정확, 논평의 자유-이를 기한 율이 범한율 보다 많아야 신문인이 자긍 할 수 있는 조건에 있게 된다』그러면서 신문인의 긍지는「신문인의 지조와 기백」에 요약된다고 보았다. 『덕이 있어 사회 명사에 부족하고, 지식이 있어야 학자에 떨어지고, 시국의 조리에 있어 정치인의 역량에 못 따른다 해도 좋다. 신문인은 백절불굴의 기백을 가지면 된다』고 오 소장은 말하면서 『취재에 있어서의「리서치」나「어프로치」…이때의 장애를 극복하는 힘을 요즘 신문 기자는 더 길러야 할 것 같다』고 다짐한다.
신문인의 시대적 사명감이나 직업에 대한 긍지를 강조하면서 최준 교수는 서재필 박사를 예로 들었다. 『서 박사는「내가 동포를 이끌고 나간다. 하루 바삐 국민 대중을 깨우쳐야 되겠다」는 열화 같은 생각으로「독립 신문」을 발간했다』고 한다.

<경계해야 할 부산물>
그때의 서 박사는 거리낌없이 수구파에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신문인이 지닌 긍지의 부산물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거듭 말하는데『신문인이 긍지만으로 살 때 치밀한 노력을 아끼게 되며 타성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가 치밀해지고 기능이 확대되고 동시에 사회의 제 목적이 다원화해져 균형이 무너지기 쉽게 되어 병폐가 많이 생겨나게 될 때 신문의 역할은 그만큼 가중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의 경우처럼 사회 전반에 걸쳐 「근대화」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어 여러모로 개혁과 빠른 성장과 전체적인 협조가 필요할 때 개체와 개체를 연결하고 정책 입안자와 피치자간의 유통을 원활히 하고 미지의 분야를 새로운 지식으로 배워야 한다. 이것이 신문의 사명으로 부각될 때 신문인이라는 지식인에게는 더 큰 긍지가 생기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오종식씨의 말처럼 신문인이 사명을 다할 때만「자긍」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신문인의「지식 의식」이다. 이것은 오직에 대한 반의어다.
최석채씨는 『부패란 전체 사회에도 해당될 수 있다. 신문도 그 일부분으로 보고 바로 잡아야할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진정한 언론인과 사이비 언론인을 구별해야 한다. 이 사이비 언론인이 횡행하는데는 이를 단속하지 못하는 정부의 권력에 책임이 있다』고 결론한다.
물론 신문인이 4·19직후처럼 사이비 기자가 우글거리면 이것을 고발하고 또 감시할 책임은 있을지언정 진정한 신문인이 이를 근절하는 권한이나 힘은 없다는 것이다.

<긴요한 신문의 독립>
그리고 최 부회장은『오늘날 신문 경영자들이 확고한 자신을 가지면 신문인의 오직을 막을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즉 신문인의 긍지를 뒷받침하는 대우를 해줄 자신 또는 자질을 가진 기자만을 확보하고 나쁜 기자를 도태해 나가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준 교수 역시 『신문이 재정 면에서 독립하지 않고는 신문인이 긍지를 지켜나가기 힘들다』지적했다. 이제는 어떤 편집 면에서의 독립만으로 긍지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한다.
사회 일반에도 강한 마력을 지닌 금전공세에 대해 최 교수는 장지연이 얼마나 청담했던가를 예시했다.
한·일 합병이 되자 장지연은 마산으로 내려가 은거하고 시와 술로 울분을 달랬다.
그의 쟁쟁한 경력과 필력을 탐내어 일본의 관헌이 당시 대한매일신보로 초빙했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기고라도 해달라 한 것마저 거절해버리곤 가난을 되씹으면서 끝내 세상을 하직했다.

<신문인에게 외상 뜯기는 것을 영광으로 알던 세상>이었던 만큼 장지연의 이런 뜻이 세상 사람들의 받드는 바가 되었다 하더라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는 접에서 오직을 경고하는 좋은 귀감이라 하겠다.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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