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당쟁의 뿌리 이조전랑 … 인사비서관이 그 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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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이조전랑(吏曹銓郞)은 이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합쳐 부른 말이다. 정랑과 좌랑은 관원을 전형(銓衡)하는 권한을 가져 전랑이라고 불렸다. 정 5~6품인 낭관(정랑과 좌랑)은 그리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나 여론기관인 삼사(三司, 사간원·사헌부·홍문관)의 관리 및 자신의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런 이조전랑 자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다투면서 조선의 붕당정치가 시작됐다(1575년).

 훗날 영조는 이조전랑의 후임자 추천권을 폐지(1741년)하고, 두 정파의 인사를 골고루 기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폈다. 하지만 이조전랑이란 자리 하나가 결국 붕당정치를 태동시키면서 끝내 왕조를 기울게 만들었다. 이조전랑 자리는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인사 비서관’이라 할 수 있다. 인사에 관한 권한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청와대 인사비서관은 각종 공직 후보자들의 인사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다 추천하는 역할을 맡는다. 정부에 따라 역할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권한이 클 때는 인사에 대한 검증까지 담당했었다.

 그러나 이렇게 중요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인사비서관’이란 자리가 없었다. 무소속 박주선 의원이 법무비서관 자리에 있으면서 인사 비서관과 민정 비서관의 역할을 함께 했다. 이후 인사 업무가 독립하면서 역할이 분담됐다. 노무현 정부에선 별도로 청와대 수석급의 ‘인사보좌관’이란 자리를 만들어 인사 추천을 할 수 있게 했다. 이를 확대 개편한 게 인사수석비서관이다. 장차관과 수석, 정부의 3급 이상 인사는 인사수석실을 거쳐야 했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더불어 김명식 인사비서관(1급)을 임명한 뒤 지금까지 그에게 인사 추천 업무를 맡기고 있다. 그러나 5년 내내 인사와 관련해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출범 초기부터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출신)’ 인사로 비판을 받았고,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부터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 등이 줄줄이 낙마한 게 대표적 사례다. 공기업·공공기관을 포함한 공공부문에선 낙하산 인사 시비가 일상화됐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마저 지난해 12월 25일 공공부문에서 이뤄지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낙하산 인사에 대해 경고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김 비서관은 지난해 8월 인사기획관(차관급)으로 승격됐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인사 논란은 적지 않았다. 공기업 낙하산 투입은 당시도 마찬가지였고, ‘코드 인사’ 논란까지 불거졌다. 그러나 당시 정찬용 인사수석비서관은 “220V에다 110V 코드를 꼽으면 타버린다”며 “코드 인사가 (오히려) 필요하다”고 반박하기도 했었다.

  한국외국어대 이정희(정치학) 교수는 “역대 정권처럼 ‘코드인사’ ‘고소영 내각’ 등으로 국정 이 초기부터 흔들리지 않기 위해선 첫 단추인 인사비서관 인사부터 중립적으로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려면 대통령과 인사비서관의 출신 지역이 달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과 이명박 정부 시절 대통령과 동향 인사가 인사담당 업무를 맡으면서 특정지역 편중 인사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김경진·하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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