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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서양역·용전법-잠곡 금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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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26세에 진사과합로>
조국근대화의 여명기인물로서 네째로 들어야할 이는 명·위 교체기이던 인조 대에 세번이나 중국에 다녀오는 한편 그곳에서 본대로 우리나라에서도 서양력법· 용전법· 용거법 등을 쓰게 한 금육이다.
금육은 중종 14년(1519)에 일어난 기난사화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청풍인 성균관대사성 금식의 사대손인 참봉 금흥우의 맏아들로서 1580년에 서울마포에서 태어나 자를 백후, 호를 회곡이라 일컫고 죽은 후 문정이라는 익호를 받았다.
그는 천성이 굳세고 용감하며 일찌기 서인파의 유음 김상헌에게 글을 배워 학간이 해박하였으므로 선비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10여세 때에 임신왜란이라는 큰 국란을 겪고 26세때 진사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다시 글을 닦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대학생들의 뜻을 모아 광해군 원년(1609)에 앞서 연산군조이래 거듭 일어난사화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김굉필·정여창·조광조와 주자학의 대가이던 이언적·이황의 이른바 오현을 문묘에 종사케 하여 달라는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이러는 사이에 광해군이 서인파 금유들에게 내쫓기고 인조가 1623년에 즉위하게되니 44세이던 잠곡은 그 스승의 추천으로 양반의 죄를 다스리는 의금부의 낭관 벼슬을 받고 다음해 봄에 일어난 이후의 반란 때에는 공주로 피신한 인조를 따라가 그 공로로 음성현감이 되어 백성을 처음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왜란 이후 도탄에 빠진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과중한 과세와 그 징수의 부정방법을 없이할 것 등을 적은 글을 임금에게 올리고 그해 가을에 시행된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함으로써 출세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구력법 폐지를 상청>
그리하여 그는 1625년에 관리의 풍기를 다스리는 사헌부지평이 된 것을 비롯하여 효종 9연(1658) 9월5일에 내세로 죽을 매까지 전후 34년 동안에 있어서 성균 관직강· 이조정랑· 의정부 사인· 충청도 감사· 승정원 동부승지· 홍문관부제학·한성부우윤·성균관대사성·이조참간· 형조예조판서·의정부 우참찬·관상감제조·학방부제조· 오영호군· 우의정· 중추부영사·영의정·실록청총재관· 좌의정· 돈영부판사· 호위대장· 춘추관영사·돈영부영사를 역임하고 대광보국실록대부의 작위를 받았다.
이러는 사이에 그는 또한 동지사, 원손보양관, 주문사로 되어 세번에 걸쳐 중국에 다녀오는 한편 민생의 안정과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대동법, 용전법, 용차법을 시행할 것를 거듭 역설하고 서양력서인 시헌력을 새로이 쓰게 하였다.
잠곡의 첫번쌔 중국사행은 병자호란이 일어나려던 인조 14년(1636)에 동지사 겸 하정사로되어 6월에 서울을 떠나 명의 서울이던 북경에까지 갔다가 다음해 5월말에 돌아온 일이 있다.
그런데 바로 그때 12월에 조국은 병자호란이라는 큰 국란을 또 만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가 강복하고 소현세자일족과 봉임대군들은 볼모로 잡혀 청의 서울이던 심양(봉천)으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잠곡의 귀국이 늦어지게 된것도 이 때문이었다.

<종래의 공물세 폐지>
그는 귀국 후 인조를 뵈읍고 아뢰기를 『명조인들은 호난사를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며 명의 관기는 지극히 문란하여 환관(내시) 이 국사를 전횡하고 있다』라고 하여 온연 중 우리나라의 관기를 바로 잡아야할 뜻을 밝혔다. 그리고 그는 다음해 (1638)에 충청도감사로 부임하게 되니, 우리나라에 있어서 가장 공물세미수의 방법이 문란한 그 도의 민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토산물을 바치게 하던 종래의 공물세법을 폐지하고 토지일결에 대하여 쌀 2두와 포목 1필씩을 거둬 중앙과 지방관묘의 수용으로 쓰게하자는 이른바 대동선헌법의 시행을 임금에게 상청하였다.
이 대동법은 그에 앞서 이원익들의 주장에 따라 l608년부터 경기도 강원도 등에서 한때 시행하다가 반대파의 공격으로 중지된 일이 있었는데 이를 보다 충실히 연구하여 잠곡은 충청도 대동사목을 임금에게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 충청도대동사목도 또한 김집의 반대로 곧 시행을 보지 못하마가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고 반곡이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됨에 이르려 1651년8월에 비로소 시행을 보케 되었고 이어그의 아들이던 김좌명의 상청에 따라 경기·강원·전라· 경상· 황해도에서도 실시를 보게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은 종래의 과중한 각종의 토산물을 대신하여 땅 일결에 대하여 춘추로 쌀 6두나 포목 1필씩을 바침으로써 생활의 안정을 얻게되었다.

<상평통보의 실용화>
잠곡의 두번째 중국사행은 그가 앞서 호군에 잡혀간 소현세자의 맏아들이며 인조의 원손이던 석철의 보양관이 되어 1643년7월에 서울을 떠나 심양으로갔다가 다음해 8월에 원손을 모시고 귀국한 일이있다.
이 거듭한 사행으로 그는 중국에서 돈이 전국적으로 유포되어 상업을 일으키고 있고 수례가 많이 이용되어 사람과 물건을 나르는데 크게 이바지하고 있음을 보고 돌아온 그해 9월에는 곧 성균관대사성의 자리에 있으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수레를 써서 식량을 나를 것과 상점을 개설하여 돈을 쓰게 함이 옳을 것이다』는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그러므로 잠곡은 우리나라의 원시적 상업형태를 근대화하기 위하여 l634년부터 만들어진 상평통보를 보다 많이 만들어 먼저 사신들이 왕래하는 황해· 평안도에서 쓰게함으로써 차차 전국적으로 유통하게 하자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 용전론은 받아들어져 1651년부터 양서지방에서 시행되었으나 5년 후 또 자료의 부족으로 중단되었다가 남인의 허적이 정권을 잡게된 1678년부터 비로소 전국적으로 시행되게 되었다.

<혁신 일으킨 용차론>
한편 잠곡이 주장한 용차론도 인부와 우마의 힘에만 의존하여 짐을 나르던 그대의 육로수송에 대한 잉ㄹ대혁신안이었으나, 산 길이 많은데다가 수레가 다닐만한 넓은 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으로 말미암아 제도화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조국근대화를 위한 착안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잠곡의 세번째 중국사행은 소현세자의 부인이던 강빈이 독살된 후 이를 변명하기 위하여 1646년2월에 진주부사로 되어 서울을 떠나 북경에 갔다가 다음해에 돌아온 일이 있다.
이 사행을 전후하여 그는 북경에 머물러있던 독일 신부와 아담·TIF이 만든 시헌역이라는 서양 달력이 이미 명국에서 1638년께부터 사용되고있고 청국도 이에 따르고 있으며 그것이 가장 합리적인 개량력임을 알고 1645년12월부터 이 신역을 우리나라에서도 쓰게 함으로써 고려말이래 4백년동안 써오던 허형 등의 구력을 폐지하도록 거듭 상청하였다.

<드디어 시헌력 채용>
그리고 그는 북京에서 구득한 서양력법관계의 제서를 관상감관 김상범들로 하여금 극력강구하게 한 결과 효종 4년(1653)에는 드디어 시헌력이라는 서양력법을 채용케 하였다.
이밖에 잠곡은 거듭한 외란으로 소실된 구리 활자를 다시 만드는데도 관심을 두어 아들인 김좌명과 더불어 세종 16년(1434)에 만든 갑인자를 세번째로 주조하였고 지지·병략·복서에도 통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사행시의 시집인 집두오언시와 일사일화를 적은 잠곡필담과 개성의 명승고적을 적은 천성일록과 사행시의 느낀 바를 적은 감개론과 그의 고조부 등의 전기를 적은 기묘팔지전과 우리나라의 명신전을 적은 해동명신록과 명국의 약사를 기록한 황명기략과 당쟁관계를 적은 당적내외세보와 고사 등을 수록한 고사증산· 종덕신편·유원총보 등이 있었다. 【유홍열 <필자=서울대 교수·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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