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에서 꽃 피우는 독일인의 '한옥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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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서울 종로구 삼청동.가회동.원서동.재동 일대의 북촌(北村) 한옥마을은 조선 왕조 대대로 고관대작들이 모여사는 고급 주거지역이었다.

옛집들을 허물고 성냥곽처럼 밋밋한 현대식 건물들을 건축하는 시대의 흐름에서 소외된 채 섬처럼 고립됐던 북촌은 최근 몇년새 전통 한옥을 개.보수하거나 신축할 때 비용 일부를 지원하는 서울시의 지원에 힘입어 수십년, 수백년된 먼지를 털어내고 새단장을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감사원으로 올라가는 삼청동길, 베트남 대사관 옆 샛길을 2백~3백m 따라가면 나오는 35-166번지는 겉보기에는 요즘 북촌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내는 여느 '재건축 한옥'과 다를 바 없다.

아무런 칠도 하지 않아 나무결이 생생하게 드러난 대문과 창문에서는 싱싱한 원목향이 느껴질 만큼 새집 냄새가 물씬하다. 1월 말 완공을 목표로 마무리 단장이 한창이어서 27평 대지 위에 자리잡은 건평 17평의 아담한 한옥은 제 모양새를 완벽하게 갖췄다.

뜻밖에 건축주는 다목적 위성을 개발하는 '콤샛(KOMPSAT)2 프로젝트'에서 부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독일인 프랑크 길래스(42)다. 우주선 기술자가 한국 전통 한옥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한옥을 짓고 있는 것이다.

대전 대덕에서 일하는 길래스는 주말마다 서울에 올라와 건축 진행상황을 확인하고 손수 작업을 하기도 하다 지난 7일부터는 아예 휴가를 내고 마무리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길래스가 한옥 건축의 세부적인 노하우를 습득하도록 도운 길래스의 직장 동료 소귀영씨와 길래스 본인으로부터 설명을 들을수록 새집은 예사 한옥과 다르다.

독일 엔지니어다운 장인 정신, 꿋꿋한 소신은 전통에 개량을 적당히 덧붙이는 어정쩡한 타협을 거부했다. 꼭 필요한 부분을 빼고는 철저하게 전통적인 건축 방식을 고집했다.

대들보처럼 큰 하중을 견뎌야 하는 부분은 헐리는 집들에서 빼온 고(古)목재들을 사용했다. 요즘 개량 한옥에는 여간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웬만한 한국 목수들도 모르는 시시콜콜한 주문 사항이 많아 공사 초기에는 한국인 인부들과 마찰이 많았다고 한다.

길래스는 "한국의 전통 한옥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살기 불편한 집이 아니다"며 1년 가까이 한옥 건축에 매달리며 체득한 '한옥관(觀)'을 밝혔다.

제대로 한옥 짓는 목수들을 만나기 힘들어 직접 한옥을 짓기로 결심한 길래스는 지난해 6월부터 한옥문화원이 한옥을 짓고 싶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개설한 '내집을 지읍시다' 강좌를 듣는가 하면 강화도 학사재, 안동 하회마을 등 전국의 잘지은 한옥들을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 때문에 한옥에 관한 안목, 건축 지식에 관한 한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길래스는 "한옥은 최신 기술을 활용해 적절한 난방시설을 갖추면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더없이 쾌적한 주거환경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주거환경은 그렇다치고 길래스를 사로잡은 한옥의 매력은 무엇일까.

길래스는 "나무 재료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고 밝혔다."리노베이션이 막바지 단계에 들어서 요즘 기뻐하기에도 바쁘다"는 길래스는 "빨리만 지으려 하지 말고 전통적인 방식을 살릴수록 한옥은 살 만한 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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