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그래도 젊은이의 창의력을 믿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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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국무총리·본사 고문

대선의 열기가 지나간 후여서인지 세모(歲暮)가 다가와도 지난날에 대한 허전함이나 내일로 향한 바람 같은 것을 느끼기 어려운 분위기다. 그래도 새해에는 나라의 운세와 국민들의 살림이 한층 더 좋아지기를 우리 모두는 기원하고 있다.

 올해로 우리 사회는 산업화 50년, 민주화 25년을 결산하고 평가하는 역사적 고비를 넘어가고 있다. 전 세계가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를 최고의 성공사례라고 우리로선 듣기 거북할 정도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우리 스스로가 돌아보아도 50년 전 암울했던 후진경제와 빈곤의 늪, 그리고 25년 전 숨 막히던 권위주의시대에 비하면 우리는 분명 산업화와 민주화를 상당한 정도 이룩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국민들의 생활만족도와 미래에 대한 기대치는 걱정스러운 수준에 머물러 있고 불안감, 배신감, 불만과 불신이 팽배해 있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다. 세계사의 주류와 중심에 합류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국내에서는 정치적 분열과 불신, 경제적·사회적 양극화와 공동체의 와해라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국가적 위기 상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개혁과 변화로의 국민적 의지를 반영하는 데 지난 18대 대통령선거에 임한 여야 후보가 똑같이 적극적인 데서 우리는 새로운 희망과 기대를 가질 수 있었다. 민주정치 25년의 실험이 보여준 한국 정치의 한계와 모순을 과감히 탈피하는 데에, 그리고 위험수위에 이른 소득의 양극화와 복지의 부실상태를 해소하는 데에 국정의 우선순위를 보여주겠다고 여야가 입장을 같이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외교정책이나 남북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이 없었다는 아쉬움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논리가 작동한 것이다. 76%에 달하는 높은 투표율도 이러한 상황의 심각성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반영하는 동시에 개혁과 변화의 힘도 궁극적으로는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되겠다는 민주시민의 성숙도를 과시한 것이다. 치열한 선거전에도 불구하고 당락이 결정된 후 공생과 화합의 정치를 약속한 두 후보의 모범적 자세도 역시 한국 민주정치의 성숙된 측면의 하나였다.

 이번 대선은 경제민주화를 최우선 단일과제로 부상시킨 선거로 기억될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 체제의 근간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융합시키느냐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한다는 헌법 119조 1항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국가는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2항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것은 정치권과 경제주체들의 최우선 과제로 당장 지혜를 모으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대선이 한국적 나눔문화를 강조하며 국민들의 공동체의식을 부각시켰다면 차제에 통일과 남북관계에 대한 기존의 보수와 진보의 입장을 한 방향으로 같이 가도록 조율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진보와 보수의 새로운 역할분담은 획기적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 촉진제가 될 것이다. 남북 간의 상호이익을 적절히 조절하고 주고받는 협상은 진보보다 오히려 보수 쪽에서 담당하는 것이 결과를 촉진할 수도 있다. 40년 전 냉전의 와중에서 미국과 중국의 외교관계 수립을 추진한 것은 공화당의 닉슨과 키신저였다는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북한 주민의 복지와 인권문제 등에 대해서는 보수보다 진보 쪽에서 중심 역할을 맡는다면 보다 바람직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결국 경제민주화든 국제 및 통일문제든 창의적 발상에 입각한 새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며 이는 보수와 진보, 여야 정치세력 간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창의력의 경쟁시대에 살고 있다. 새 시대를 여는 열쇠는 국가발전의 중심동력으로 젊은 세대의 창의력을 어떻게 활성화시켜 나가느냐에 달려 있다. 여권이나 보수진영은 이번 대선 승리에 기여한 50, 60대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무대의 중심을 젊은 세대에게 넘겨주는 일에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편 진보세력은 보수보다도 훨씬 미래지향적이며 세대교체에 과감한 것이 진보 본연의 자세임에 유의해 냉전시대나 민주화시대의 이념, 집념, 한(恨)을 지켜가는 노인들의 영향권에 더 이상 머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변화와 개혁의 동력이 새롭고 젊은 상생과 조화의 리더십을 기약할 것으로 믿으면서 새해 아침을 기다린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