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과 군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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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프랑스」에 있는 미군과 미군시설은「프랑스」의 지휘권 하에 들어와야 한다는「드·골」대통령의 호령을「워싱턴」이 거절했다는 보도가 있다. 69년에 가서「프랑스」에서 미군이 철수하고,「프랑스」가「나토」에서 탈퇴해서,「유럽」의 방위가 더 잘된다는 군사적 이론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군사적 조치라기보다는「드·골」의 정치적 포석이라는 인상이 짙다.
『월맹은「디엔비엔푸」에서 보다는「파리」에서 더 큰 승리를 거두었다』라는 말은 최근 미국상원에서 증언한「테일러」장군의 말. 「디엔비엔푸」가 떨어진 것이 54년 5월이었는데 그때 현지 사령관이던「나바르」장군은 2개 사단만 증원 받으면 10월까지는 버틸 수 있으리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본국 정부는 협상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6월 하순엔 월남에서 손을 떼겠다고 미리 정해 놓고 있었고, 당시의 국방상은 2년 후에 있을 국회의원선거를 걱정해서, 증원군 파견이란 있을 수 없다고 딱 잡아뗐다. 「나바르」의 군략은「파리」의 정략 때문에 멍이 들고만 것이다.
「프랑스」의 지휘권 때문에 영국군이 골탕먹은 일이 있다. 1940년,「유럽」에 가있던 영국군이 구사일생으로「당커크」에서 철수했을 때,「프랑스」에는 아직도 3개 사단이 남아있었다. 이 병력은 한창 독일군에 몰리고 있던「프랑스」군의 지휘하에 있었고 당시의 불 군사령관은「웨이강」장군. 딱했던 일은 70노령의「웨이강」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패망직전에 있던「프랑스」의 위치는 깜깜소식이었고, 한편「처칠」은「프랑스」의 사기에 영향이 미칠까봐 영국군을「웨이강」의 지휘권에 끝까지 매두었다.
영국군 사령관은 전화통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웨이강」의 지휘권을 벗어나서, 사경에 이른 영국군은 철수하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결국「프랑스」의 항복소식을「라디오」로 듣고,「처칠」과 한시간 반 동안의 격렬한 전화논쟁을 벌인 다음「부룩스」장군은 허둥지둥「프랑스」를 빠져 나왔다.「웨이강」만 믿었더라면, 그리고「처칠」이 그의 정략을 끝내 고집했다면 대전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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