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이야기 이장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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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독일에 유학 갈 때 나는 구두 한 켤레를 더가지고 갔다. 초행이 아닌지라 외국의 구두 한 켤레 값은 우리네 세 켤레 값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연구소에는 Y라는 동양인 교수가 한 분 있어서 우리는 곧 맥주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Y교수는 비가 올 때 새 구두를 신고, 갤 때 헌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이었다. 이유인즉『낡은 구두는 바닥이 뚫어져서 비가 오면 샌다』는 것이다.
이 고장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아이가 우산을 받고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가 많이 온다. 얼마 안가서 40「마르크」짜리 Y교수의 새 구두는 쭈글쭈글해질 수밖에-.
그러는 동안 내 구두도 많이 닳아서 새것을 신기로 했는데 이놈은 습기를 탄 탓인지 비명에 가까울 만큼 요란한 소리를 냈다. 며칠을 참고 다녔으나 도저히 안돼서 헌 것을 갖다 맡겼더니 구둣방 영감은 굽이 닳은 부분만을 밀어서 새 굽 하나를 대각선으로 잘라 반반씩 양쪽에다 갖다 붙여놓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었다. 결국 구두쇠의 금「메달」은 독일영감이 차지한 셈이다.
식자 중에는 2차 대전의 원인을 1차 대전 후 연합국이 독일에 강요한 조건이 너무나 가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동료들이 술회하는 이패도지 후 독일국민이 겪은 참상이란 실로 눈물겨운 바가 있었다. 『우리를「유럽」의 구두쇠라고들 빈정대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선 도저히 살아 갈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Y교수의 나라는 우리보다 부자다. 서독은 Y교수의 나라보다 훨씬 더 부자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은 바닥이 뚫린 구두를 신고 다니며 또 구두 굽 한 개로 두 쪽을 고치는 것을 다반사로 알고 있다. 남의 종노릇도 해보았고 좁은 땅덩어리는 갈린 데다가 전란의 상처까지 겹쳐 헐벗고 굶주리는 이웃이 있는 마당에 머리와 가슴, 그리고 호주머니와 심지어 밥 주머니까지 빈 친구들이 온갖 사치를 즐기는 곳이 바로 우리나라다.
「유럽」일주의 행운을 지녔던 내 구두였지만 막상 고국에 들어와서 구박을 받는 신세가 된 것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의 병질「사치병」은 정녕 불치병이란 말인가? <의박·서울대의대 내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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