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과 바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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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졸업과 더불어 입대할 날짜를 눈앞에 두고 고향에 내려와서 한가한 며칠을 보내는 동안 무척 심심하여 동네 청년들이 모이는 곳에 가니 소위「나이롱 뽕」이란 화투놀이에 정신이 팔렸다.
기껏해야 술 담배 내기지만 그것도 해동하면 쌀 한 짝 값이 넘는다니 얼핏 대단치 않은 것 같으나 봄이 되면 끼니가 없어 보리죽도 변변히 못 먹는 처지들이고 보면 가벼이 넘길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작 새끼틀이나 가마니틀을 마련해서 씨름을 해도 품삯조차 떨어지지 않는다고 팽개쳐 버려야하는 그들의 유일한 오락이라면 또한 너무나 나무랄 수도 없지 않은가.
어쨌든 오락은 생활에 절대 필요하므로 투기성이 없는 건전한 오락을 생각한 끝에 바둑을 권했더니 이외로 바둑「팬」이 많았다.
거의가 군에 있을 때 어깨 너머로 배운 정도이지만 마치 구세주나 만난 듯이 바둑 좀 가르쳐 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한 가닥 용기를 얻은 나는 쾌히 승낙하고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사랑방을 깨끗이 치운 뒤 바둑판 두 대를 마련해 놓았다.
이제는 3급의 짧은 실력이나마 그들에게 바둑에 대한 흥미를 불어주는 것만이 남았지만 지리한 농한기에 농가에서 할 수 있는 손쉬운 오락을 하나같이 열망하는 그들에게 삶에 대한 생기를 불어줄 풍성한 일거리가 못내 아쉽다. <이성근·충북 청원군 강서면 비하리304·23세·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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