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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매듭지어야 하는 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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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호 27면

괜히 마음이 바쁘다. 12월인 까닭이다. 딱히 밀린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다. 이래저래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때이니, 몸이 바쁘지 않으면 마음이라도 바빠야 할 것 같다. 알고 보면 이것도 습관이다. 바빠서 바쁜 게 아니라 뭔가 바빠야 할 것 같은 시절인 탓이다.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지인들의 송년 모임 몇 건은 폭설 때문에 길이 막혀서, 혹은 교통이 불편한 산골에 산다는 핑계를 대며 사양했다. 달력에 표기된 공식 일정이 아니라면 두문불출을 다짐하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다.

삶과 믿음

겨울 살림살이를 위해 김장을 했다. 인근 고랭지 밭에서 배추를 트럭으로 실어왔다. 어차피 내다팔 것이 아닌 까닭에 크게 인위적인 손길을 보태지 않고 가능한 한 노지 상태에서 가꾸는지라 배추 포기도 아담한 게 대부분이다. 심지어 땅바닥에 퍼져 아예 꽃배추가 된 녀석도 적지 않다. 제대로 모양을 만들기 위해 허리에 매어둔 짚풀이 속이 차기도 전에 흘러내린 까닭이다. 자연산이라 모양은 별로 볼품이 없지만 어디에 내놓더라도 맛과 향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배추걷이가 끝난 휑한 빈 산밭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한 해를 마무리한다. 배추로서는 아름다운 마무리이겠지만 김치로서는 새로운 시작인 셈이다.

산중의 겨울 추위는 혹독하다. 한지로 만든 문풍지로 냉기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할 수 없이 출입문과 창문에 비닐을 덧댄다. 기와집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예술적(?)으로 잘 덮는 게 관건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늘 해오던 일이라 숙련된 솜씨로 마무리했다. 작업을 마친 후 처음에는 통풍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갑갑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그것에 길들여진다. 두툼한 수건을 두어 장 길게 깔고 물을 흠뻑 적셔주는 작은 수고만 보탠다면 밤새 습도가 조절돼 콧속이 마르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본래 한옥은 숨쉬는 집이라 바닥은 따뜻하지만 천장은 추울 수밖에 없다.

또 아무리 단열처리를 해도 개방형 집 구조로 인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궁여지책으로 겨울 한 철은 비닐의 힘을 빌려야 한다. 따뜻한 날은 그 비닐이 눈에 거슬리지만 한파가 덮칠 때마다 더없이 고마운 마음이 든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긴 하지만 그래도 창문 한쪽에 살짝 뚫어둔 작은 환기구를 열 때마다 바깥의 싸함이 답답한 방안으로 밀려들면서 정신을 번쩍 들게 해준다.

수백 년 세월 그 자리를 지켜온 마당 한쪽의 화강암 수곽은 12월이 되면서 물을 담는 본래 역할을 끝내고 바닥을 드러낸 채 제 몸을 말리고 있다. 겨울 내내 비스듬히 해바라기를 하면서 지낼 것이다. 얼마 전까지 철철 물이 넘쳐 가끔 새들도 와서 목을 축이고 잠자리가 꼬리를 담갔다 사라지곤 했다. 지금 그 자리에는 고양이가 지나가면서 울음으로 적막을 깨뜨릴 뿐 한 해가 저물어가는 고요함으로 가득하다. 설사 생명 없는 돌이라 할지라도 휴식은 필요한 법이다. 그런 쉼이 해마다 있었기에 그 자리를 오늘까지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12월엔 돌도 쉬고 나무도 쉬고 산도 쉰다. 사람도 매듭을 지어야 한다. 쉼을 통한 한 매듭은 한 켜의 나이테가 되고 한 해의 연륜이 되며 또 한 살의 나이가 된다. 겨울 시간이라고 흐르지 않을 리 없지만 섣달은 흐르는 걸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정지된 느낌이 세밑 무렵의 또 다른 산중의 맛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옛 사람은 이런 시를 남겼나 보다.

산중무일력 한진부지년(山中無日曆 寒盡不知年·산속이라 달력이 없어 추위가 지나가도 연월일을 모르겠네).



원철 한문 경전 연구 및 번역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하고 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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