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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귀식의 시장 헤집기] 푸틴이 셰일가스 겁내는 이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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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호 29면

막강 권력자이자 ‘터프 가이’라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두려운 게 두 가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인터넷이다. 언론 자유가 부족한 러시아에서도 인터넷만큼은 통제가 쉽지 않아 반푸틴 세력의 확성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러시아의 올해 언론 자유 수준은 세계 197개국 가운데 172번째다(프리덤하우스 발표).

다른 하나는 셰일가스다. 깊은 땅속에서 뽑아올리는 천연가스다. 과거 개발의 손이 닿지 않던 것을 미국 기업들이 새로운 기술로 캐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퍼올리는 셰일가스는 ‘가스 대국’ 러시아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게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출신 푸틴다운 판단인 듯하다.

셰일가스는 두 가지 경로로 에너지·자원 판매 수입에 의존도가 높은 러시아를 괴롭힌다. 우선 미국은 국내에서 석탄 대신 셰일가스를 쓰면서 유럽에는 싸게 석탄을 팔 수 있다. 그러면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 소비를 줄이게 된다. 또 유럽에서 셰일가스를 개발하는 경우다. 폴란드에만 300년 쓰고 남을 셰일가스가 묻혀 있다니 그런 게 개발되면 러시아산 가스는 판로가 좁아지고 가격도 떨어지는 이중고에 빠진다.

셰일가스는 산업혁명 시대의 석탄, 그 뒤의 석유를 이을 에너지원으로 부상하고 있다. 생산이 늘면서 미국의 천연가스 가격은 유럽의 3분의 1, 한국·일본의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싼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해 화학기업들부터 미국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제조업 르네상스’ ‘셰일가스 혁명’의 기대를 낳을 만하다.

원전 사고 이후 액화천연가스(LNG) 소비가 급증한 일본도 미국 셰일가스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한국 같은 나라에만 판매를 허용한다. 미국과 FTA를 맺지 않은 일본이 미국산 가스를 수입하려면 미 정부의 허가를 얻는 게 필수다. 일본이 미 에너지 전문가와 언론, 정치인을 상대로 설득전을 펴온 이유다. 최근 미 에너지부(DOE)가 “어떤 가정을 해도 LNG 수출은 미국 경제에 긍정적”이란 보고서를 내놓았다. 일본은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다. 일본이 러시아 카드를 활용해 미국을 압박했을 수도 있다. 러시아는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까지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가스를 공급하겠다고 제안해 놓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미국이 셰일가스 덕분에 2030년이면 에너지를 완전 자급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본다. 1973년 11월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프로젝트 인디펜던스’로 명명해 제시했으나 구호에 그쳤던 에너지 자립이 실현될 날이 멀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 날이 오면 미국 외교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중동이 뒤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 “셰일가스가 중동에서 죽는 미국 젊은이들을 줄일 것”이란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미국의 에너지 자립은 잠재적으로 베를린 장벽 붕괴, 중국의 부상과 맞먹는 지정학적 변동 요인으로 꼽힌다. 새 에너지는 새로운 외교 카드다. 자국이 주도하는 중동 안정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일본에 미국은 추가 부담을 요구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푸틴은 선견지명의 지도자다. 이렇다 할 자원도 없고 하루하루 정전 대란을 걱정하는 우리에게도 ‘에너지 백년 대계’의 큰 그림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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