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여인(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궁중에는 궁녀들이 있다. 백제왕궁에는 3천 궁녀가 있었다지만 이씨 왕가 마지막 임금인 순종에는 5백여 명의 궁녀가 있었다. 궁녀는 궁중에서 왕과 왕비, 그리고 왕자와 공주 등 왕의 직계가족의 일상생활을 받드는 직책을 맡은 여인들이다. 궁중여인들의 벼슬에는 정일품에서 종구품까지 18계급이 있다. 조정외 신하들의 품계와 같은 계급의 벼슬을 가진 셈이다.
가장 높은 계급인 정일품「빈」에서 종사품인 숙원까지는 왕의 부실로서 맡은 직무 없이 그저 영화를 누릴 뿐이다.
그 아래 정오품부터 종구품까지 10계급의 여인들은 제각기 직무를 가진 궁녀들로서 통칭 상궁이라 한다. 궁녀는 처음 열서너 살 때 새앙머리 땋아 맨 나인(내인)으로 들어온다. 그후 20세가 가까와 성숙하면 새앙머리를 풀고 쪽을 찌는 관례를 지낸다. 그리고 임관이 되면 종구품부터 상궁이 되는 것이다.
상궁에는 계급에 따라 맡은 직무가 다를 뿐 아니라 20세 어린 소녀로부터 80이 넘는 노상궁까지 있다. 일단 궁중에 들어오면 그곳을 떠날 수 없고, 늙고 병들어 직무를 맡을 수 없으면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게된다. 젊은 상궁은 왕의 눈에 들어 왕비가 될 수 있고 어린 왕자를 업어 기른 상궁은 그 왕자가 자라서 왕위에 올라 크게 대접받는 일이 많다. 그런 특혜를 입지 못한 대다수의 상궁들은 꽃다운 젊음을 그대로 그늘에서 지낼 뿐이다.
늙은 상궁은 젊은 상궁을, 젊은 상궁은 어린 상궁을 층층이 거느리고 그들 밑에는 나인과 무수리(잡역부)가 시중을 들게된다.
상궁 중에서도 왕의 처소인 대전에서 왕에게 시봉 하는 지밀 상궁은 모든 궁녀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왕의 생활에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옆에서 모든 시중을 들기 때문이다. 수랏상 앞에서 음식과 다과를 올리고 잠들기 전 왕의 팔다리를 두드리고 유희나 산책에 등반하는 등….왕도 인간이라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지내며 자기를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아름다운 여인을 싫어 할리 없을 것이다.
어린 궁녀가 들어오면 늙은 상궁이 교육을 맡아 자연 할머니 어머니 격으로 대를 잇게된다. 이 때 젊은 나인들은 지밀상궁의 눈에 들어 그를 도와 대전 일을 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게 마련이다. 이 왕가 마지막 황후인 윤 황후를 모시던 상궁은 이제 몇 분이 남았을 뿐이다. 3년전 노환로 은퇴하여 세검정「월연산방」에서 여생을 보내는 유경운(82) 상궁. 그는 16세에 입궐하였고 윤 황후가 입궁하자 이내 그 분을 모셔 오늘에 이르렀다. 유 상궁은 순종의 운명을 지켜봤으며 윤 황후의 피난길도 줄곧 모셨다.
윤 황후를 마지막까지 모신 김명길(73) 박창복(60) 성낙영(47) 세 상궁 중 김 상궁은 윤 황후를 따라 입궐, 60년간을 말동무 글동무로 반려하였다.
이들 상궁은 왕의 눈에 들어 비·빈이 된다든지 권세를 잡아 천하에 떨쳐볼 생각은 없어 조용한 생활을 보냈겠지만 이제 그들이 일편단심 모셔오던 주인을 잃고 그 허전함과 슬픔을 어떻게 달랠 것인가. <J>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