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대해부] 4. '경쟁 촉진' 잊고 산업정책 '응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3월 기자는 워싱턴에서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5인 위원회'의 한 명인 실러 앤서니(70)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임명됐고, 임기는 2005년 9월까지다. 앤서니 위원은 "행정부와 사법부.의회로부터 독립된 기구"라는 말로 FTC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어떻게 독립성을 확보하느냐고 묻자 "대통령이 나를 해고 못해. 그만큼 중요한 게 어디 있나"라는 말로 대신했다.

선진국이 공정거래기구의 독립성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것은 정치권과 재계의 외풍(外風)을 막아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거래위원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경제수석으로 있을 때 금융감독위원장을 배석시키자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거부했다.

금감위와 공정위가 왜 '부'나 '처'가 아닌 '위원회'인지를 상기해야 한다. 감독기구는 정치권의 이해나 판단에서 독립해야 한다."(강봉균 한국개발연구원장)

공정거래위원장 임기는 3년으로 법에 명시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다. 전윤철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해 3월 위원장에 연임됐는데,다섯달 뒤인 8월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옮겼다.

◇ 휘둘리는 경쟁정책=지난 5월 28일 공정위는 갑자기 보도자료를 냈다. 하이닉스반도체가 현대그룹과 지분 관계를 완전 정리하지 않아도 주식처분위임장과 경영권 포기각서를 채권단에 내면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하이닉스는 해외에서 설명회를 하며 투자자를 찾고 있었다. 공정위는 그 전날까지 "간단히 결정할 일이 아니다"고 밝혔다가, 이날 오전 청와대 경제수석실로부터 전화를 받고 입장을 정리했다.

전화 내용은 '하이닉스의 외자유치가 성공하려면 현대그룹에서 분리된다는 점을 확실히 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빅딜(대규모사업교환)이 사실상 실패한 것으로 평가되는 판에 적어도 공정위라도 빅딜을 막았어야 옳았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당시 공정위는 제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빅딜도 지지부진하다"(1999년 1월 전윤철 위원장)는 등 빅딜을 간접 지원했다.

산업정책은 재정경제부나 산업자원부가 한다. 빅딜이 경쟁을 줄이는 것인데도 공정위는 막지 않았다.한국경제연구원 황인학 박사는 "공정위는 스스로를 산업정책 부처로 착각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 이상한 위원회=공정위는 9명의 위원이 전원회의에서 합의해 중요 사항을 결정하는 합의제 기구다. 그런데 9명 가운데 위원장과 부위원장,1급 위원 3명 등 5명이 공정위 관료다. 민간의 목소리를 듣자며 임명하는 위원 4명은 모두 비상임이다.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이 이뤄지므로 민간 비상임위원이 반대해도 정부 관료들이 뜻을 합치면 소용이 없다.

더구나 정부측 위원은 같은 위원인데도 직급이 다르다. 공정위 내부에서조차 "위원간 서열을 정한 것 자체가 문제다. 4명의 위원이 위원장의 부하인데 어떻게 위원장의 결정을 반대하겠는가"라고 지적한다.

정부 쪽에 편중된 구조를 믿고 위원회가 아닌 다른 곳에서 공정거래정책을 결정하는 경우도 잦다.정부가 일단 결정하면 공정위 전원회의 통과는 절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정치논리 털어내려면=강명헌 단국대 교수는 "공정위가 실질적으로 정권과 독립해 소신을 갖고 경쟁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면서 "공정위원장과 위원은 국회 추천.인준으로 임기제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광식 박사(전 한국개발연구원 법경제팀장)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해 공정위원장 임명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시장을 생각하고, 경제를 걱정한다면 공정위부터 독립시키라는 얘기다. 또 기업 구조조정은 채권은행과 시장에, 경제적 약자 보호는 중소기업관련법 등 유관 법률에, 편법적인 부의 세습은 세법에 맡기고,공정위는 경쟁촉진이란 본연의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획취재팀=김영욱 전문위원, 송상훈.이상렬.서경호 기자 economan@joongang.co.kr>

***미국 · 독일 경쟁당국 "오로지 경쟁만 생각"

미국 경쟁당국은 법무부 독점금지국과 연방거래위원회(FTC)로 이원화돼 있다. 독점금지국은 정부기구지만, FTC는 대통령의 지휘권에서 벗어난 독립 행정위원회다.

대통령이 임기 7년인 연방거래위원을 임명하는데 상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독일 연방카르텔청은 국가이익에 부합돼도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는 기업결합은 승인하지 않는다.

다만 거시경제를 운용하고 전반적인 경쟁정책의 틀을 짜는 연방경제부는 연방카르텔청의 결정을 바꿀 수 있다.

경쟁당국은 경쟁 제한 여부만 판단하라는 것이다. 두 나라는 '견제와 균형'을 공정거래기구의 운용원칙으로 삼고 있다.

외국 경쟁당국은 전문가 집단이다.

미국 독점금지국 직원은 거의 변호사 등 법률전문가며,FTC도 법률.경제전문가로 채워져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