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은 서비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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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주변을 촉촉하게 하는 물방울, 가습기의 본질이다. 이경미 사이픽스 대표는 본인의 대표작으로 물방울 가습기(2009)를 꼽았다. 가습기는 직육면체여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형태와 기능을 단순화해 독일 IF 어워드, 독일 디자인 협회상,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의 핀업 동상, 한국 디자인대상 등을 휩쓸었다. [사진 사이픽스]
이경미

디자이너 이경미(48) 사이픽스 대표는 직원 12명과 함께 지난 3월부터 반 년간 일산 명지병원을 숱하게 드나들었다. 똑같이 흰 가운을 입고 회진하는 의사 뒤를 따라다니거나, 응급실에서 밤을 지샜다.

 디자이너와 병원, 얼핏 봐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이유가 있었다.

지식경제부·한국디자인진흥원 의뢰로 2차 의료기관 정형외과의 서비스 디자인을 맡아서다. 서비스 디자인이란 무형의 서비스를 시각화·실제화해 고객이 서비스를 더 높은 가치로 경험토록 하는 것이다. 의료·에너지 등 공공분야를 중심으로 한 ‘사회 문제 해결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디자이너 이경미, 업계 관계자가 아니라면 생소한 이름이다.

아이리버 M 플레이어(2006), 루펜리 음식물처리기(2007)와 물방울 가습기(2009)의 디자이너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국내 중소기업과 손잡고 제품 디자인의 선두에 서 온 그가 요즘 서비스 디자인에 빠져 있다.

 그는 “제품의 가치를 높여 삶을 풍요롭게 하는 디자인을 해 왔다. 그러나 더 많은 물건을 만드는 디자인이 환경에 과부하를 가져오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었다”고 말했다. “불편함을 개선해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서비스 디자인에 보람을 느낀다”는 게 요즘 그의 마음이다.

7일 서울 잠원동 사이픽스 사무실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이렇게 보니 알기 쉽다. 새롭게 개선된 국민건강보험 건강검진 결과서(부분). 현재 시범 사업 중이다.

 - 당신의 시작이 궁금하다.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졸업 후 현대자동차에 입사, 울산에서 생활했다. 기숙사에서 살 수 있다기에 덜컥 지원했다. 5년 뒤 LG전자로 이직해 오디오·캠코더·휴대폰 등을 디자인했다. 2000년 독립해 사이픽스를 설립했다.”

 - 히트 상품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닐까. 이것은 영감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바라보고 생각하고 메모하는 습관이 있다.”

 - 인문학 공부에 관심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인가.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 디자인하우스 이영혜 대표와 함께 ‘40인의 의자’라는 프로그램을 3년째 꾸리고 있다. 디자이너를 위한 인문학 강좌로 서울대 홍성욱 교수의 뇌과학 강좌, 간송미술관 탁현규 연구원의 ‘우리의 옛 글씨’ 등을 함께 공부했다. 좀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디자이너들의 일, 그러려면 미래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살아왔던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의 나를 응시하고, 지혜도 얻고, 생각도 축적해야 한다.”

 그렇다면 디자이너들은 병원을 어떻게 ‘치료’했을까.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정형외과엔 하루 평균 103.4명의 환자가 찾는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와 함께 온 보호자로 늘 북적이고, 불편한 곳이다. 1인당 진료 시간은 2∼3분, 의사 입장에선 100번 이상 비슷한 설명과 진료를 반복해야 한다.

 누구나 경험하는 병원의 ‘고질병’, 디자이너들의 처방은 동선 조정 등을 통한 서비스 개선으로 수렴됐다.

우선 진료실을 두 칸으로 나눠 다음 대기 환자가 제2진료실에서 대기토록 했다. 1, 2진료실 사이의 긴 복도를 통해 의사가 움직이게 했다. 순서가 임박했음을 알려 환자의 스트레스를 덜어줬다. 이름이 불린 뒤 불편한 몸으로 허겁지겁 들어오지 않아도 되자 준비 시간도 절약됐다.

 또 비슷한 증상 및 이에 따른 주의사항을 유형화하고, 이를 출력해 진료 받고 나가는 환자 손에 들려 보냈다.

프로젝트는 10월 완료됐고, 환경 개선을 원하는 병원은 한국디자인진흥원 등과 상담할 수 있다.

 이 대표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디자인이란.”

이런 대답이 나왔다. “서비스, 배려, 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못했을 거예요.”

디자인은 그렇게 우리 바로 곁에서 숨쉬고 있었다.

[중앙일보·예술의전당 공동기획] ‘K-디자인, 10인이 말한다’ 연재 내용

① 싸이 촌스러움, 그게 디자인 : 장성은 YG엔터테인먼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② 디자인은 디테일이다 : 송봉규·이석우 SWBK 공동대표.

③ 브랜드가 곧 비즈니스다 : 조수용 JOH 대표.

④ 디자인은 극복이다 : 오석근 현대디자인센터장·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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