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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제국을 움직이는 거인들 [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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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의 앤디 그로브 회장은 본인 스스로 편집증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공산 헝가리를 탈출, 미국으로 건너온 난민 청년이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강력한 반도체회사의 회장이 되기까지 그가 몸으로 터득한 생존전략이 그의 말에 배 있다. “포천”지가 이 시대 가장 터프한 경영자로 그를 뽑은 것에도 이런 이유가 있다.

반도체혁명 주도 인텔의 앤디 그로브

“편집증 환자만이 살아남는다”

캘리포니아 마운틴 뷰에 있는 인텔의 원래 사무실 뒤에 서 있는 앤디 그로브 회장

1956년 12월의 어느날 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접경지역. 서치라이트가 번쩍거리고 개들이 컹컹 짖어대는 가운데 군인들이 저벅거리며 행진하는 소리가 찬 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 어둠 속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한 청년이 빗물로 질퍽거리는 차가운 땅바닥에 바싹 엎드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거기 누가 있소?”

인기척을 느낀 한 사내가 청년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소리쳤다. 헝가리 말이었다. 청년은 공포로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아직도 헝가리를 못벗어났다는 말인가? 부다페스트를 탈출하기 위해 청년은 기차를 타고 경찰의 검문을 피해 가면서 어렵게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왔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밀수꾼에게 돈을 다 털어 주고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비밀 루트에 대한 정보를 샀다. 그 길을 몇시간이나 걸어 이제 오스트리아 땅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더욱이 오는 도중 소련의 붉은 군대가 헝가리 10월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탱크 10개 사단을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밀고들어와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이고 있다는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유대인이었던 청년은 이미 나치 치하에서 대학살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인민의 적’이었고 그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련군이 밀려들어오기 전에 서둘러 몸을 피해야 했다.

저쪽에서 다시 사내가 “누가 있느냐”고 재촉했다. “밀수꾼이 나를 속인 것일까?” 잡히면 바로 시베리아행이었다. 청년은 마지막 용기를 쥐어짜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오스트리아.”
그 순간 사내의 목소리는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인텔은 어떤 회사인가

마이크로컴퓨터시대 주도

1968년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가 설립, ROM·RAM·마이크로프로세서들을 잇따라 개발함으로써 마이크로컴퓨터시대를 주도한 회사. 1998년부터 컴퓨터 프로세서와 네트워킹·커뮤니케이션 분야로 사업을 이원화하고 인터넷시대를 맞아 새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현재 45개국에 8만5,000여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은 337억달러, 순익 105억달러를 기록했다.

이 시대의 가장 터프한 경영자

이날 사선(死線)을 넘은 청년이 바로 인텔의 회장인 앤디 그로브(64)다. 1968년 출범하면서부터 인텔을 30여년 동안 이끌며 반도체혁명을 주도한 바로 그 사람이다. 조지 길더는 “마이크로코즘”이라는 책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인텔은 이날 헝가리 국경 근처에서 큰 위기에 처했었다고 쓰고 있다. 이 호리호리하고 잘 생긴 난민 청년이 나중에 반도체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인물이 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밤 국경에서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경험은 앤디 그로브에게 생존본능을 더욱 날카롭게 했다. 이보다 앞서 나치 치하에서 대학살의 악몽,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 공포에 함몰돼 자포자기하거나 어떻게든 살아 남기 위해 생존 의지를 다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로브의 삶을 좌우한 것은 후자였다. “포천지”가 선정한 이 시대의 가장 터프한 경영자로 앤디 그로브가 뽑힌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에 인생의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로브에게는 생존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인텔이 역사상 유례 없는 변화의 격랑 속을 헤치고 나와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회사 중 하나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몸에 배인 그의 생존본능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로브의 생존전략은 훗날 그가 펴낸 “편집증 환자만이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 Survive)는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에서 그가 힘주어 말하는 것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특히 기업이 그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았다고 해도 잘못된 결정을 한다면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그는 1957년 난민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식당에서 접시 나르는 일을 하면서 밤에는 학비가 저렴한 뉴욕시티칼리지(2년제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는윌리엄 포크너 과목만 C를 맞았을 뿐 대부분 A를 받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엔지니어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당시 “뉴욕타임스”지는 3년전 미국에 올 때만 해도 영어를 못하던 헝가리 난민 청년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영어사전을 옆에 놓고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전문용어를 이해하기도 어려운 엔지니어링학과에서 수석을 했다고 그로브의 성공 스토리를 자세하게 보도하기까지 했다.

이후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UC버클리 박사과정에 들어간다. 거기서도 그는 주목을 받았다. 학위를 딴 후 그는 명망 있는 벨연구소와 스타 엔지니어들이 모여 만든 신생 회사인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를 놓고 어디로 갈지 고민한다.

1960년대초 컴퓨터업계는 번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었다. 컴퓨터 처리 속도를 더 빠르게 하고 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성능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들은 온도라는 장벽에 부닥쳤다. 성능을 높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스위치가 필요했는데 컴퓨터에 일을 많이 시키면 시킬수록 컴퓨터는 더 뜨거워졌다. 스위치 역할을 하는 진공관에서 열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이 진공관을 열이 덜 나는 트랜지스터로 대체하는 것이 당시의 화두였다. 이러한 혁신 작업의 선봉에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가 있었다.

그로브는 페어차일드를 선택한다. 거기서 그의 인생에 중요한 두 사람인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를 만나게 된 것이다.반도체산업의 성장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윌리엄 쇼클리와 트랜지스터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현대과학의 가장 중요한 공적인 트랜지스터의 발명은 1948년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를 포함해 세명의 연구원에 의해 이뤄진다. 진공관의 on-off 조작을 기계적 장치로 한다면 반도체 소자인 트랜지스터는 전자를 제어하는 전자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장치를 만드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노벨상이라는 영광을 얻은 쇼클리는 이번에는 돈이라는 토끼를 쫓기로 한다. 실리콘밸리에서 처음으로 반도체회사를 설립하고 미국 전역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끌어들였다. 이 가운데는 노이스와 무어도 있었다. 그러나 90개의 특허권을 갖고 있던 이 오만한 과학자는 제2의 중요한 요건을 과소평가하는데, 그것은 트랜지스터를 양산할 수 있는 순수한 결정물질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결국 쇼클리는 자신의 이론을 상품화하는 데 실패한다.(몇년후 지구 위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모래로부터 그 물질을 찾아낸 사람은 벨연구소의 옛 동료인 고든 틸이다. 이것이 바로 실리콘이다.)

쇼클리는 또 젊은 과학자들을 도제처럼 대했다. 자신이 최고라는 자부심에 빠져 있던 이 과학자는 이들의 우수성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반도체에 관심이 있던 동부의 페어차일드사가 회사를 만들자고 제의하자 이들은 미련 없이 쇼클리를 떠나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를 설립한다. 쇼클리는 이들을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실리콘밸리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8인의 반역자’사건은 이렇게 일어난 것이다. 이들은 쇼클리를 떠났지만 쇼클리의 꿈은 갖고 간다. 그리고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완성함으로써 실리콘밸리가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이 ‘실리콘밸리의 창시자’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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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천 뉴스위크한국판 기자
자료제공:월간중앙(http://monthly.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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