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넝쿨 드리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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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23면

유리로 된 와인 병이 마치 스테인드글라스 같다. 디자이너는 병 위 레이블에 창문을 그려 넣었고 그 주변을 포도 나무와 포도로 장식했다. 병 속에 불이라도 켜진다면 멋진 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이 레이블은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의 파 니엔테(Far Niente). 최초의 와이너리는 1885년 설립됐지만 1919년 대대적인 금주령으로 문을 닫게 됐다. 그 후 오랫동안 방치됐다가 지금의 오너인 베스와 길 니켈이 1979년 인수하면서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인수 당시 와이너리를 재건하면서 건물 초석에서 ‘돌체 파 니엔테(Dolce Far Niente: 무위의 즐거움, 안일)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이를 와이너리 이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혁의 레이블로 마시는 와인 <6>파 니엔테(Far Niente)

이 레이블을 디자인한 사람은 톰 로드리게스(Tom Rodrigues). 14살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간 그는 4년 만에 남을 가르치는 경지에 이른 재주꾼이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길 니켈의 집에 머물며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파 니엔테를 인수한 뒤 레이블 디자인을 고민하던 길 니켈로부터 의뢰를 받게 됐다. 오래된 것과 현대적인 내용을 모두 포함하는 레이블을 만들어달라는.

디자인은 아르누보 화가이면서 장식 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진 알폰스 무하와 스테인드글라스 예술가로 잘 알려진 루이스 컨포트 티파니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우선 황금색으로 안과 밖의 테두리를 도톰하게(엠보싱) 살리고 정면 위에 ‘Far Niente’를, 그리고 그 아래 첫 설립 연도인 1885년을 별도의 황금 테두리를 사용해 내부에 넣었다. 외부 두 테두리 안에는 청포도와 포도 잎으로 아름다운 장식을 했고 가을 수확기에 단풍 든 잎의 색을 잊지 않았다. 가운데는 마야카마 산 아래 자리한 대칭의 돌 건물과 포도밭을 넣었는데, 1885년 당시 와이너리 건물 사진의 모습과 같은 모양이다. 포도밭 아래에는 나파 벨리와 와인을 만든 포도 이름, ‘샤르도네(Chardonnay)’가 들어섰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디자인이지만 포도와 포도 잎에만 컬러를 썼고 산과 건물, 포도밭은 흑백을 이용해 오래된 느낌을 주었다. 바로 베스와 길이 원했던 다른 두 느낌을 한 장에 표현한 것이었다. 이 레이블은 1979년 첫 빈티지에 사용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8년에는 1886년 파 니엔테 빈티지 화이트 와인이 한 개인 셀러에서 발견돼 미국 와인계에서 큰 뉴스가 됐다. 이때 레이블은 19세기 이 와이너리를 소유했던 존 벤손의 조카이면서 미국 인상주의 화가였던 윈슬로 호머가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길은 레이블만큼이나 와인 품질에 열정을 갖고 있어 직접 만든 지하 동굴에서 모든 와인을 숙성한다. 특히 파 니엔테 화이트 와인에는 특별한 섬세함과 우아함, 그래서 귀족적이지만 지나치지 않은 풍미를 지닌 균형미가 느껴진다.

톰은 파 니엔테 와인 레이블의 디자인을 계기로 프랑스 보르도와 버건디 와인 레이블 수집을 시작했고 아르누보와 와인 자체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는 2001년 와인과 예술의 두 길을 걷기 위해 멘도시노 카운티로 이사했고 매플 크릭 와이너리의 와인 메이커라는 새 삶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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