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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라도 좋아,초능력자로 신나게 살아봤으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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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호 24면

2012년 대한민국 전체를 관통한 키워드는 ‘힐링’이었다. 공연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송년 시즌을 맞은 지금도 ‘힐링’을 내세운 공연들이 대세다. 뮤지컬 팬들이 뽑은 힐링 뮤지컬 1위라는 ‘맨 오브 라만차’는 장장 6개월 동안 무대를 지키고 있다. 여기에 5년 만에 앙코르 무대에 오른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도 힐링 코드에 탄력 받아 임창정·이종혁·고창석 등 스타 캐스팅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2013년 2월 6일까지 이화여대 삼성홀

‘벽을 뚫는 남자’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프랑스 뮤지컬이다. 화려한 브로드웨이 쇼뮤지컬이나 북유럽 뮤지컬의 웅장함과 스펙터클이 없는 대신 기발한 상상력과 재치 있는 유머, 서정적인 선율과 노랫말로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어른을 위한 동화’다.

프랑스의 국민작가이자 20세기 최고의 단편소설가 중 하나로 꼽히는 마르셀 에메의 동명 소설이 원작. ‘쉘부르의 우산’ ‘007시리즈’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등 세 차례의 아카데미 영화음악상과 다섯 차례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최고의 영화음악가 미셸 르그랑이 작곡했다. 1996년 초연 당시 프랑스의 토니상으로 불리는 몰리에르상 최우수 뮤지컬 상과 최우수 연출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2002년에는 미국적 색채를 가미해 ‘아모르’라는 이름으로 브로드웨이에 입성했고, 소박한 휴머니즘을 선호하는 일본에서 유독 인기가 높다. 지난 10년간 대표적인 뮤지컬극단 시키(四季)가 열도 70여 개 지역을 순회했을 정도다.

느닷없이 초능력 갖게 된 평범한 사내
전쟁의 기억이 아직 생생한 1940년대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사는 우체국 민원담당 직원 듀티율은 요령 피우며 대충 일하는 나태한 동료 사이에서 바보 취급을 당할 정도로 성실하게 살아가다 어느 날 갑자기 벽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처음엔 당황하지만 점차 대담해진 듀티율은 상점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장물을 나눠주며 군중의 영웅으로 부상한다. 영웅심에 취해 짝사랑하던 여인의 관심을 끌고자 은행에 침입해 도시 전체를 놀라게 한 듀티율. 급기야 감옥을 뚫고 나와 달콤한 사랑을 성취한다. 평범하게 살다 느닷없이 초능력과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이 남자,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을까?

시종일관 해피엔딩을 예감케 하는 유쾌한 분위기로 흘러온 만큼 반전의 충격이 크다. 벽 사이에 갇힌 신세가 되어 주변인들의 행복을 빌며 최후를 맞는 엔딩은 ‘벽을 뚫는’ 행위의 상징성을 새삼 깨우친다. 그것은 해리포터의 마법처럼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다. 사방으로 꽉 막힌 현실을 뚫고 어딘가로 가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의 잠재의식이다.

하지만 벽을 뚫고 나간다고 행복이 보장될까? 벽에 낀 채 오도가도 못하는 듀티율의 모습에 복권 당첨자의 비극이 떠오른다. 그들이 별안간 찾아온 행운을 주체하지 못해 일상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대부분 불행해진다는 통계치에 왠지 모를 위안을 받는 것처럼 우연히 비상한 재주를 손에 넣어 스타가 된 듀티율이 맞는 비극은 기적을 꿈꿀 수 없는 세상을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를 달래는 노골적인 장치다.

그래서 이 작품엔 앙상블이 없다. 신문 배달부, 매춘부, 거리의 화가 등 몽마르트 언덕을 오가는 모든 등장인물은 듀티율의 드라마를 위한 배경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연을 노래하며 존재감을 다져 간다. 듀티율이 벽 안의 화석이 된 후 저들이 각자의 테마곡을 부르며 재등장하는 엔딩이야말로 한 번도 벽을 뚫어보지 못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인생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예찬이 된다.

‘난 그저 보통 남자, 성실한 공무원. 소박한 하루하루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장미에 물을 주고 우표수집을 하고, 대단할 것 없다 해도 인생을 사랑했지~.’ 아름다운 선율로 소박한 인생을 예찬하며 수차례 반복되는 듀티율의 테마는 충분히 훈훈하다. 그런데 관객에게 합창을 권유하는 커튼콜에 이르러서는 좀 거북했다. ‘벽을 뚫고 앞으로 나가라’가 아니라 ‘괜히 벽 뚫으려다 벽에 갇히지나 말고 얌전히 살라’는 메시지의 강요로 들려서다.

같은 힐링이라도 기왕이면 ‘벽 속에 갇혀 있지 말고 다시 꿈꾸라’는 메시지를 듣고 싶은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올 한 해 쏟아져 나온 ‘욕망을 버리라’는 스님들의 명상서적만 헤아려 봐도 소박한 인생 예찬이 2012년 힐링 코드의 한 축이 된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자아의 성찰은 조용히 음미할 때 치유의 힘이 발휘되는 법. 다함께 복창은 분명 오버다. 막이 내린 뒤에도 이 낭만적인 판타지의 여운을 남겨 줄 마무리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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