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설화』(1)|원갑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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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등장 인물>
남자 갑
남자 을
여자 병

<장소>
출구를 잃어버린 어느 동굴 속

<때>
시계를 잃은 뒤의 시간은 그들 관념 속에 있을 뿐이다.

<무대>

<어느 긴 동굴 속의 한 지점, 이곳은 어느 동굴보다 천장이 높고 장소도 넓다. 왼쪽과 오른쪽 통로가 뚫려 있고 그 외는 모두 막혀 있다. 겨우 주위의 윤곽만을 알아 볼 수 있는 희미한 빛이 차 속에서 답사반들은 나가는 길을 잃었다. 잠시 후 답사반 세 사람이 통로에서 피로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등산복 차림을 했는데, 신경질적인 젊은 청년이 램프를 들고 앞장서고 뒤에 젊은이보다 나이 많은 여자가 동물적인 표정을 하고 마치 청년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따라온다. 마지막에 늙수그레한 남자가 여자를 보호하듯 차례로 오른쪽에서 나와 조심스러이 무대를 횡단하여 왼쪽 통로로 사라진다.
잠시 텅 빈 무대의 침묵 뒤에 또 다시 오른쪽에서 삼인이 완전히 피로한 낯빛을 띠고 나타난다. 첫번 젊은이는 완강히 고집스런 표정을 하고 다시 왼쪽 통로로 들어가려 한다. 이때 여자가 소리치면서 말린다.>
여병 틀렸어요. 우리는 길을 잃었어요! 길을 잃었어요!
남갑 (램프를 들고 주춤거리며 선다)
여병 아아 피로해! 더 이상 못 걷겠어요! (여자는 아무데나 털썩 주저앉는다. 뒤따라 남자 을도 앉으며 땀을 닦는다.)
남을 길은 찾기 틀렸어. 골백번 돌아야 같은 길로 되돌아 나올 뿐이야. 마치 다람쥐 쳇바퀴를 도는 것 같어.
남갑 (신경질적으로) 시끄러워! 늙은 망텡이. 누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진 않았어. 우리는 길을 찾자고 하는 것 뿐이야.
남을 그렇지만 찾을 수 없는 걸. 남갑 누가 늙은 망텡이 말을 듣고 있는 줄 알어? (램프를 들고 가려 한다)
여병 아아, 피곤해요! 누가 물 좀 주세요. (남자 을은 재빨리 몸에서 물병을 끌러 여자 입에 갖다 준다. 여자는 당연한 듯이 받아 마신다. 그 꼴을 바라본 남자 갑은 자신도 목이 마른 것을 느낀다) 드세요! (남자 갑이 램프를 놓아두고 물병을 받는다. 그리고 다 마시자 옆에 버린다. 남자 을이 그것을 들고 입에 가져가나 빈 물병임에 뭐라고 중얼대며 던져 버린다)
여병 (남자 갑에게 들으라는 듯이) 누가 팔 다리 좀 주물러 줬으면! (남자 갑은 못 들은 척 한다. 남자 을이 여자 앞으로 가까이 와서 머뭇거린다)
여병 당신은 안돼요! 당신 손과 목은 징그러운 옴투성이인데 난 옴을 옮기고 싶지 않아요! (남자 을은 풀이 죽어 제자리로 돌아간다. 여자는 스스로 자기 몸을 안마하면서 남자 갑을 살며시 넘겨다본다. 남자 갑은 성난 듯이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여병 여보세요!
남갑 ……….
여병 전 배가 고픈데 비스켓 좀 주시지 않겠어요?
남갑 당신 것이 있잖아?
여병 아까 먹어 버렸어요.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파서….
남갑 난 참어 왔어. 나갈 길을 발견할 때까지 참고 있단 말이야.
여병 그렇지만, 당장에 배가 고파 죽겠는걸 어찌하죠?
남갑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당신 좋을 대로 다 먹어 버린다면 앞으로 어쩌란 말이야? 누구도 줄 수 없어. (여 병은 그 말에 울먹인다. 그때 남자 을이 비스켓 몇개를 들고 여자 앞에 선다. 여자는 놀라 빼앗는 듯이 전부 가져온다)
남을 (기쁜 듯이 웃으며) 남겨 두었지. (배낭을 열고 더 몇개 남았다고 보인다)
여병 왜 먹지 않으세요?
남을 만일을 위해, 당신을 위해 남겨두는 거야! (여자는 기쁜 듯 먹는다. 그걸 보고 남자 갑은 비스켓 한개를 입에 넣고 우물거린다. 그리고 몹시 굶주린 표정으로 침을 삼키면서 자기를 바라보는 남자 을을 보자, 잠시 노려보더니 비스켓 한개를 던진다)
남을 괜찮습니다.
남갑 체면 차릴 것 없어, 얼간 망텡이. 어차피 당신 것은 여자에게 다 뺏기고 말 테니까.
남을 나를 생각 하시군요!
남갑 천만에, 나를 생각해서다.
남을 어쨌든 좋아요. (입에 넣고 씹으며) 그런데 말이죠. 우린 이 동굴은 언제 빠져나갈까요?
남갑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남을 당신은 아까 앞으로 일을 염려해서 식량을 아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남갑 그랬지. 그러나 빠져나갈 수 있다고 말한 적은 없어. 다만 우리가 이 동굴 속에서 더 사는 것을 연장하는 동안 출구를 찾도록 해보아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야.
남을 희망이 있을까요?
남갑 누가 알아?
남을 (절망적으로) 아아, 우리는 골백번 찾아도 같은 장소만 돌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될까요?
남갑 (퉁명스럽게) 죽는 수밖에 없지. (이때 여자는 훌쩍거리며 울기 시작한다)
남갑 시끄러워! 당신뿐만이 아니야. (여자는 더욱 슬피 운다) 시끄럽다니까! 운다고 찾아지는 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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