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이러고도 사람이 먼저라는 말 할 수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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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민상
사회부문 기자

지난 11일 밤 서울 강남구 S오피스텔. 민주통합당 소속 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오피스텔에 사는 국정원 직원 김모(28·여)씨가 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에 대한 악성 댓글을 남겼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다. 이날부터 김씨의 오피스텔 앞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민주당 관계자와 취재진 등 수십 명이 뒤엉켜 인근 주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다. 민주당 관계자들은 문 앞을 막아선 채 “김씨가 나와서 직접 해명하라”고 윽박질렀다. 김씨는 “대선 관련 글을 남긴 적이 없다”며 오피스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 지루한 공방은 사흘째인 13일 민주당 관계자들이 모두 철수하면서 일단락됐다.

 기자는 지난 사흘간 이른바 ‘국정원 여직원 사건’ 현장을 지켰다. 민주당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번 대통령 선거의 최대 변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흘간 목격한 현장은 진실을 밝히려는 공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피스텔 앞에는 민주당 김현·강기정·우원식 의원을 비롯한 당직자 수십 명이 몰려왔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의혹이 있으며 관련 증거를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이 경찰에 제출한 고발장에는 그런 증거가 담겨 있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민주당이 제출한 증거는 김씨의 출퇴근 시간과 동선 정도가 전부였다”며 “이 정도 증거로는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결국 민주당은 불충분한 증거를 내밀고선 “왜 수사를 하지 않느냐”며 생떼를 쓴 셈이었다.

 아직 국정원 정치공작 의혹의 사실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다. 김씨가 하드디스크를 경찰에 제출했으니 수사 결과를 기다려볼 일이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민주당이 의혹을 제기한 방식은 여론의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민주당은 사흘간이나 김씨를 집 안에 사실상 감금했다. 민주당 관계자들은 김씨의 친오빠와 아버지의 출입까지 막아섰다.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민주당 관계자들에겐 그럴 법적 권한이 없다. 만약 김씨에게 의혹이 있다면 민주당 측은 김씨가 인터넷에 남겼다는 비방 댓글 등 구체적인 범죄 혐의를 특정해 고발했어야 한다.

 또 김씨의 출퇴근 시간과 동선이 파악된 경위도 미심쩍다. 민주당은 김씨의 동선을 파악하기 위해 1주일간 잠복했다고 밝혔다. 범죄 의혹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한 20대 여성을 미행했다는 얘기다. 불법 민간인 사찰을 지탄하던 공당(公黨)의 처신으로선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다. 한 민주당원은 현장에서 취재하던 기자에게 욕설을 퍼붓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다. 문 후보를 지지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행태도 도마에 올랐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국정원 직원 김씨의 오피스텔 이름과 위치를 트위터에 올렸다. 문 후보의 문인 멘토단 소속인 소설가 공지영씨는 김씨 어머니의 일부 신상정보를 적은 한 네티즌의 글을 리트윗하기도 했다.

 딸이 이틀째 감금돼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오피스텔로 달려온 김씨의 아버지(58)는 취재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문 후보가 이러고도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딸이 비방 댓글을 달았다고 의심받지만 이제는 내가 먼저 달고 싶은 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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