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투표하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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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빙엄, 군 선거, 1852, 캔버스에 유채, 96.5x132.1㎝, 미국 세인트루이스 미술관 소장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투표일이다. 선거를 하러 마을 광장에 많은 남자가 모였고, 투표장 입구에서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투표소 옆 세 남자는 여전히 정치 토론 중이다. 이들은 무슨 열망을 갖고 여기 나왔을까. 미국 풍속화가 조지 칼렙 빙엄(1811~79)의 ‘군(郡) 선거’(1852)다. 미주리주 설린(Saline) 카운티에서 1850년 있었던 선거를 그렸다.

 그림엔 여성과 흑인이 없다. 참정권이 없었던 탓이다. 그 때문에 이 그림은 미국에서 연방수정헌법 제19조를 가르치는 교재로도 애용된다. 여성 참정권을 규정한 조항으로 1920년 효력이 발생했다. 뉴욕주 세니커폴스에서 세계 최초의 여권(女權) 신장 집회가 열린 지 72년 만의 일이다. 미국 흑인들이 모든 주에서 실질적으로 참정권을 인정받은 것은 1965년 앨라배마주에서 투표권을 주장하던 흑인들의 행진을 경찰이 진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였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역사화를 닮은 화면 구성을 헤치고 뜯어보면 그림 속 선거 장면은 어설프기 짝이 없다. 후보자는 투표장 앞에서도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오른쪽의 파란 옷 입은 남자가 그렇다. 술판이 벌어졌고, 이미 곤드레만드레 쓰러진 이들도 보인다. 저 술판과 유세장을 지나 무사히 투표해야 할 텐데 말이다. 하긴 우리의 ‘막걸리 고무신 선거’가 불과 40~50년 전 일이다. 유세장 구석에선 막걸리 잔치가 벌어졌고, 선거운동원들은 신문지에 돌돌 말아 싼 고무신을 겨드랑이에 끼고 집집이 다니며 한 표를 호소했다고 전한다.

 시골 선거 풍경으로 국민의 의무를 묘사한 빙엄은 19세기 미국의 대표적 풍속화가다. 그는 독학한 예술가였다. 어린 시절 부친이 빚보증을 잘못 서 파산한 뒤 미주리로 이주했다. 초상화를 그려 팔며 이곳 개척민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게 된 배경이다. 유년기의 미술 교육이라곤 펜실베이니아 미술학교에 석 달 다닌 게 전부다. 오랫동안 무명으로 남아 있던 그는 1930년대 이후 재평가됐다. 탄생 200주년이던 지난해엔 명성이 절정에 달했다. 빙엄은 1948년 미주리 주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가로도 활동했다. 이 그림은 그로부터 4년 뒤 완성된 것이니, 그의 선거 경험이 리얼하게 녹아 들어갔다 할 수 있다.

 미국 선거의 과거는 이랬다. 우리와 닮은 듯 다르다. 우리나라에선 1948년 5월 10일 첫 선거가 치러졌다. 선거권은 만 21세 남녀 모두에게 있었고, 투표율은 95.5%에 달했다. 제18대 대선이 6일 남았다.